<사설> 부품업체와 세트업체는 동반자

전자부품업계와 세트업계 사이에 환율상승에 따른 환차손 떠넘기기가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고환율이 장기화하자 세트업체들이 달러를 기준으로 하던 거래 관행에서 벗어나 고정환율을 적용한 원화결제방식으로 전환, 환차손을 부품업체들에게 전가해버린 것이다.

최근 경제상황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터라 너나없이 살아남기에 혈안이 돼 버렸다. 이미 줄일 수 있는 비용은 모두 삭감하고 있다. 접대비나 생산비는 손댄 지 오래고 통신비나 주차비, 건강진단비, 입학 및 결혼축하금, 주택자금지원 등 복리후생 차원에서 지원하던 비용도 거의 없앴다. 또 일부업체들은 임금을 삭감했으며 적지 않은 규모로 감원을 통해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그룹사도 부도로 쓰러지고 있는 마당에 경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느냐는 심리가 널리 퍼지고 있는 듯하다.

세트업체들이 정상적인 거래를 하더라도 부품업체들은 사정이 어렵다. 인력이나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 최근 환율 폭등은 원자재 수입가격이 높아져 부품업체들의 경영환경을 극도로 악화시키고 있다. 부품업체가 제조원가 상승분을 판매가격에 반영할 수 있으면 그나마 충격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분위기에서 부품가격을 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환율인상에 따른 부품의 재료, 소재 가격은 지난해 이미 70%까지 올랐다고 한다. 최근 한두 달 사이에 환율이 급상승했는데 세트업체들이 그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고정환율을 적용, 가격을 매겨 부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곧 환율상승에 따른 효과를 부품업체에게 부담시켜버리는 것으로 이는 부당한 일이다.

또 세트업체들은 제품을 구입하면서 부품업체들에게 현금은 극히 일부만 지급하고 대부분을 3개월짜리 어음을 지급하고 있다. 한술 더 떠 세트업체들이 납품가격을 오히려 인하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어 부품업계의 어려움은 설상가상이다. 대표적인 부품업종인 인쇄회로기판 분야의 경우 환율인상으로 지난해 하반기 원판소재의 수입가격이 최고 70%까지 올랐다고 한다. 생산원가에서 재료비 비중이 큰 부품업체들은 이같은 소재가격 상승은 제조비를 상승시켜 결국 수지를 맞추기 어렵게 하고 있다. 벌써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 부품업체들이 최근 환율인상으로 영업을 하지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으며 일부 부품 생산업체들은 견디다 못해 장기간의 가동 중단을 선언했다. 세트업체들이 싼 값으로 부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원하는 온갖 수단과 합쳐져 부품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처한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버텨 나갈 수 있는 부품업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품업체와 세트업체는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에 있다. 세트의 경쟁력은 값싸고 품질좋은 부품으로부터 비롯된다. 세트업체들이 원가절감을 위해 부품가격을 무리하게 깎다보면 부품업체들이 아무리 자구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견딜 수 없다. 경영상태가 견실하지 않은 부품업체들이 양질의 부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어렵다.

최근 세트업체들이 환율상승을 피하기 위해 수입부품을 국산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러한 일도 국내 부품산업 기반이 튼튼해야 가능한 일이다. 부품, 소재 산업이 망가지는 것은 일순간이지만 가꾸고 키우는 것은 오랜 시일이 걸린다.

특히 일본 같은 나라는 세트업체가 부품업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지원한다. 일본이나 대만에 비해 우리의 전자제품 경쟁력이 약한 것도 중소 부품업체들이 견실하지 못한 점이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다.

이제 부품업체와 세트업체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거래 관행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최소한 대기업인 세트업체 때문에 부품, 소재업체들이 공장을 돌릴 수 없는 지경에 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것은 일종의 불공정 거래 행위이며 우리 전자산업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행정력이라도 동원해서 막아야 할 일이다. 그에 앞서 어렵더라도 세트업체들은 환율 변동에 따른 환차손을 같이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부품가격을 인하하라는 압력을 서둘러 거두어 들여야 한다. 세트업체와 부품업체가 힘을 합쳐 현재 우리가 처한 난관을 자율적으로 극복해내는 슬기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