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전쟁.
러일전쟁은 바로 러시아와 일본의 통신전쟁이었다. 그 와중에 죄없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피탈당하고 유린당했다. 그 내용이 요람일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요람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러일전쟁은 어느 전쟁보다도 통신이라는 매체에 의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전쟁이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러일전쟁은 통신이 그 승패를 가른 대표적인 모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러일전쟁 당시 우리나라 통신시설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김지호 실장이 우리나라 통신역사의 축을 잡는 데 진기홍 옹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일본이 통신운영을 수행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였다. 각 항구의 개항과 더불어 그해 12월, 부산에 일본 우편국이 설립되었고 188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저전선이 부산과 일본 사이에 연결되었다. 그 해저전선의 개설과 함께 부산 일본전신국이 설치되었고 뒤이어 인천과 원산, 서울 등지에 그들의 우편국이 증설되었다.
이후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중에 1885년 개통된 우리의 전신선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서울과 인천, 부산 등지에서 그들의 군용전선으로 전신사업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당시 조선과 러시아의 전선연결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기상전보의 실시, 무선전신 및 해저전선 가설 등 각종 특권을 요구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은 전쟁 중에 불법으로 가설한 전신선을 철거하지 않고 그들의 군대로 하여금 이를 수비케 하였는데, 일본의 이와 같은 조치는 청일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일본군이 세계의 여론에 의해 만주와 우리나라에서 철수하는 데 따른 대비였다.
그때 일본은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러한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이 우리나라의 통신시설을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협약을 맺었던 것이다.
김지호 실장은 읽고 있던 자료에서 눈을 들어 통제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수많은 절체코드가 길게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용했다. 전원이 내려진 자동절체시스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틀밤.
그저께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통제실.
이제 이곳 통제실은 평상시보다도 더욱 조용한 곳으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