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347)

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중이라는 핑계로 무조건 우리의 통신시설을 침탈하였고, 급기야는 통신원의 전화선에 그들의 전화선을 공동으로 연결하여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이었다.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나라 전체의 전화통화 내용을 도청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신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전쟁 시작과 함께 우리의 통신시설을 강점하는데 노력했다. 창원 마산지역으로 상륙한 일본군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바로 전보사의 점령이었다. 이어 모든 전보에 암호통신을 금지시켰고, 배달되는 전보내용을 다 검열했다. 음성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전화내용까지 통제할 수 없었던 일본은 통신원의 전화에 몰래 전선을 연접, 통화내용을 도청하여 정보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다.

여전히 조용했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감시용 모니터를 확인했다. 사고 당시에 붉은 빛으로 번쩍거렸던 각종 모니터의 경보표시기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정지된 상태로 있었다. 길게길게 늘여진 절체코드가 또다른 일거리로 남아 있는 상황이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대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당시 우리나라의 통신을 강점하려는 속셈은 이미 청일전쟁이 끝난 후부터 시도되었다. 그때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여긴 일본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통신시설의 확보와 함께 이 통신시설을 빌미로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는 명분까지 만들었다. 그것도 일본에게 철수압력을 가해온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서 였다.

흔히 「서울각서」라고 불리는 이 협약에서 일본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있던 전선(電線)수비병을 철회하는 대신 200명 이내의 헌병과 거유지 보호를 구실로 4개대(각 200명 이하)의 군대를 주둔시키기고, 러시아 역시 이와 동등한 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합의하였다.

이어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cholas Ⅱ)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대표와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Lb@obanoff) 사이에 이른바 「막부의정서(모스크바협약)」가 맺어졌다. 그 협약에서 일본은 당시 점유하고 있는 조선내의 모든 전선을 계속 관리(보유)할 권리를 가지고, 러시아는 서울부터 국경(두만강)에 이르는 전신선의 가설 권리를 보유하되, 조선 정부에서 그 시설을 매입할 능력을 가질 경우에는 매입할 수 있게 한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조선정부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의 통신이 외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