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분야에서는 「파운드리(Foundry)」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파운드리의 사전적 의미는 주물, 주물공장이다. 그러나 반도체분야에서는 「위탁생산」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이 단어가 최근 세계 반도체업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은 설계공정 등이 끝난 상태의 반도체 생산을 다른 업체들로부터 위탁받아 대행해 주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사업 형태는 대만 반도체업체들이 자체적인 지적재산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택하기 시작한 전략으로 「얼굴없는 업체」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당초 반도체 선진국들은 대만업계의 이같은 움직임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자국의 하청업체로 생각했던 대만 반도체업체들이 이 파운드리라는 사업 형태를 배경으로 승승장구하자 반도체 선진국들은 이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대만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쳐링)의 연간 수익률은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인 인텔보다도 높은 46%를 기록하고 있다.
파운드리사업이 이처럼 높은 수익을 올리는 원인으로는 2가지를 손꼽을 수 있다. 하나는 미국업계를 중심으로 반도체 설계만을 담당하고 제조는 타사에 위탁하는 팜리스(제조공장이 없는)업체들이 계속 늘어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도체를 개발에서 제조까지 일괄 담당하는 반도체 업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융통성 있는 사업 전개가 가능해 반도체 시황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점 등이다. 시기적으로도 최근 수년간 메모리의 수익성 악화로 반도체업체들의 설비투자가 매우 위축돼 상대적으로 위탁생산이 늘고 있다는 점도 파운드리 사업이 관심을 받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이 이처럼 유명세를 타자 수익사업을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이 사업에 본격 뛰어들고 있다. 일본 반도체업계는 「대만업체=일본의 하청업체」라는 그들 나름의 관념이 있었다. 대만이 반도체 사업 초기에 일본업체들과 적극적으로 제휴해 기술을 이전받는데 열을 올렸던 탓이다. 사실 대만 파운드리 사업의 초기형태는 일본업체들과의 기술 생산 제휴를 통한 하청 수준에 불과했다. 대만은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일본업계로부터 많은 기술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비투자를 급속히 늘리면서 단순한 하청에서 벋어나 기술, 생산 제휴업체의 제품만이 아닌 전세계 업체들로부터 수주를 받아 생산하는 확고한 사업 형태로 발전시켜나갔다.
이 때문에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파운드리사업 참여는 불황타개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는 용기있는 결단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미 지난해 일철(日鐵)세미컨덕터가 일본업체 가운데 최초로 이 시장 참여를 선언한데 이어 올해 들어서는 일본에서 상위 5위안에 드는 후지쯔와 미쓰비시전기도 적극 가담했다. 특히 미쓰비시전기의 경우는 자사 첨단 설비로 자사 제품을 생산하면서 공장이 완전 가동되기 전까지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을 채택할 것으로 보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이 무한한 시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만과 일본업계에서 이 사업 참여를 표명하는 업체가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반도체 설계만을 하고 생산은 타사에 위탁하는 팜리스 업체들이 각광받는 현상이 이미 일어나고 있고 또 앞으로 한층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반도체업체로서 어차피 반도체분야 투자를 계속할 방침이라면 늘어나는 투자비 부담의 절감과 기술력 제고 등의 차원에서 파운드리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업 형태다. 그리고 이를 실시하고 있는 업체들이 현재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신규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아직은 사업 참여 시기가 크게 늦지 않았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파운드리사업을 통한 대만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 그리고 이해타산에 밝은 일본업체들의 진출. 이러한 제반 상황은 반도체 파운드리라는 사업 형태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반도체 파운드리사업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업체는 대만의 TSMC와 싱가포르의 차타드 세미컨덕터 매뉴팩쳐링이다. 하청업체로만 생각했던 이들의 눈부신 발전을 현재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세계 반도체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심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