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
원세개는 중국과 직접 연결된 통신선로를 활용해서 강압적인 자세로 왕실을 대하고 조선정부 대신들을 자신의 부하처럼 부리는 횡포를 계속했다.
당시 미국인 고문관 데니는 원세개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청국공사 원세개의 흉악무도한 행위는 이에 극도에 이르렀다. 만약 이 대역모(大逆謀)를 성취하게 된다면 소란, 방화, 유혈, 암살 등의 참상이 연출됨은 물론이요, 서울에 거류하는 외국인과 일반 시민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각종 횡포를 부리던 원세개는 1886년 9월 초순 조선 국왕을 알현하여 여러 가지 의견을 진술하고 이른바 유언4조(喩言四條)와 시사급무10관(時事急務十款)이라는 것을 문서로 올렸다.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그 문서의 머리말에는 먼저 갑신정변을 전례로 들고, 당시에 국왕이 김옥균 등 이른바 개화파를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봉변을 당하다가 마지막에 겨우 청국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지금도 역시 부국강병론을 펴는 소인배를 임용하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만일 이 말이 잘못된 것이라면 자신의 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조선의 국왕 앞에서 눈을 빼고 혀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원세개.
이처럼 원세개가 조선 정부에 대하여 협박과 공갈을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청국까지 설치되어 있는 통신시설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땅에 조선인들의 부역과 조선 땅에 심어져 있던 나무를 베어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시설. 조선말로는 보낼 수도 받을 수도 없었던 그 전기 통신 시설을 이용해 원세개는 온갖 횡포를 다 부렸던 것이다.
여기서, 조선 정부는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조선 땅에, 조선 사람들이 가설한 통신시설이 나라를 더욱 피폐시키는 매체로 활용되고 있는 안타까움을 그냥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것이다.
김지호 실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발신음.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김창규 박사의 전화번호였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아직도 독수리가 그려진 칩의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더이상 진전된 것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 진행사항이 궁금했다. 그리고 밤을 지새우고 있는 그들에게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뚜뚜. 통화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