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357)

청국 원세개가 배탈이 났다는 전보를 띄우고 귀국한 후 사태는 날로 긴박해져갔다.

1894년 6월 23일.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풍도(豊島)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대파함으로써 드디어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습작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일본은 제일 먼저 청국이 관할하던 통신선로를 전리품으로 접수하고 즉각 군사용으로 전용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치된 인천과 서울, 평양을 거쳐 중국까지 연결된 서로전선(西路電線)은 가설 당시 일정 기간만 청국이 대리로 운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전리품이라 하여 즉각 강제 점유한 것이었다.

청국이 조선을 속국화하기 위해 설치한 서로전선.

일본은 강제로 점유한 그 통신선로를 통하여 청국군에 대한 신속한 정보를 확보, 전쟁 초기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통신전쟁에서의 승리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이어진 것이었다.

6월 23일의 풍도해전(豊島海戰)의 승리에 이어 6월 27일 성환 전투에서 청국군을 대파한 일본은 7월 1일 청국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8월 7일 평양전투에서 나머지 청국 주력부대를 섬멸하였다. 이어 일본은 의주까지 파죽지세로 공략,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완전히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강원도 지역의 통신선로였던 북로전선(北路電線)의 관할권도 강탈해갔다. 「양국의 교의(交誼)에 비추어 일본군의 전선 차용을 승인한다」는 내용에 조선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조선의 전기통신사업은 사실상 전면적인 중단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다음해인 1895년 3월 청일간에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일단 종식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완전한 침탈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접수, 점용한 통신선로를 조선 정부에 반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통신사업은 정지되다시피 했고 일본 군용전신망이 그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관보연락 등 각 지방과의 통신을 일본 군용통신소에 의뢰해야 했다. 일본 공사관으로 전보 전문을 보내고 일본 공사관에서는 다시 일본 군용통신소로 보내어 통신을 수행하게 하였다.

일본군 통신망을 통해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이 전달된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한번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호출음.

이른 새벽, 독수리가 새겨진 칩의 프로그램 분석을 계속하고 있는 김창규 박사를 호출하는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