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민간인들의 일본군 통신선 파괴행위는 전선을 끊고, 전봇대를 베는 것뿐만 아니라 전공(電工)활동에 대한 방해로도 나타났다. 지방에 파견된 일본 전공에게 돌멩이를 던져 상해를 입히거나 여관에서 숙박을 거절하는 등의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 일본 공사관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금지시켜 줄 것을 조선정부에 요구하였고, 전선 단절사고로 인한 교섭도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은 전선의 절단사고를 구실로 삼아 1895년 2월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통신사업 전체를 뿌리째 탈취해 가려고 획책하였다. 청일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한 군사적 우세를 배경으로 조선 국내의 기존 전선과 장래에 건설하는 일체의 전선에 대한 관리와 그 업무를 대신 함으로써 조선의 전기통신사업을 송두리째 탈취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에서는 인천과 서울을 거쳐 청국으로 연결된 서로전선(西路電線)의 운영을 청국에서 행하는 것에 대하여 일본이 몹시 비난하였던 것을 예로 들어, 이제 일본이 도리어 조선의 전선을 전적으로 관리하겠다 함은 천부당하다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강압적인 자세로 강제 침탈을 계속 시도하다가 1895년 8월 발생한 을미사변으로 조선 내에서 여론이 나빠지자 일단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은 군용전선을 조선에 고가로 매입하게 하고 비밀조약을 맺어 이후 위급사태 발생시 언제든지 통신권을 전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일본 측은 이러한 사항을 본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되도록 영문전보만을 사용하여 기밀누설을 방지하려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대부분 공식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전쟁의 책임을 물어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澎湖島)를 할양받고, 고평은(庫平銀) 2억냥을 지불받기로 한 일본은 전쟁종료 후 조선내 통신관련 기구의 개편과 선로 환수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지만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통신권 반환 요청에 대해 끝끝내 협조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의 강제침탈을 위한 불가결한 방안이기도 했지만 이후에 벌어지게 될 러시아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는 결론을 내고,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통신권 확보였다. 이미 일본은 러시아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통신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바람. 새벽을 여는 바람에 연광정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거리고,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한강물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김지호 실장은 길게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