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반도체업체인 NEC가 최근 올 연말까지 64MD램을 대폭 증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발맞춰 미쓰비시전기를 제외한 일본 대부분의 반도체업체들도 본격 증산에 나선다는 방침을 표명하고 나서 이르면 여름부터 일본 D램 업계에서는 64MD램이 16MD램을 제치고 완전히 주력 제품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64MD램은 D램의 최대 수요처인 PC의 판매 부진으로 시장이 본격 형성되기 전부터 가격 하락의 조짐을 보여 왔다. 「한국 업체들은 IMF쇼크로 인해 D램 부문 투자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번 일본 주요 업체들의 잇단 증산으로 64MD램이 공급 과잉을 향해 곧바로 곤두박질칠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64MD램 가격은 D램 시황 악화를 배경으로 16MD램과 동반 하락 중에 있다. 16MD램은 지난 94년에서 95년까지 2년동안 반도체업계의 효자 산업으로 손꼽히며 각 업체들에게 공전의 이익을 가져다 줬다. 그러나 이 시기 급속히 추진된 각 업체들의 생산 능력 증강 투자로 공급력이 한꺼번에 확대되고 여기에 PC 수요 둔화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96년에서 97년까지 약 2년만에 16MD램 가격은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요 반도체업체들이 64MD램에 기대를 걸고 경쟁적으로 증산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NEC는 히로시마공장과 구마모토공장 등 국내 생산 거점은 물론 미국과 영국공장 등 해외 생산 거점을 통해 일제히 64MD램 증산에 나서 올 연말 64MD램 생산규모가 현재의 약 2배인 월 1천2백만개로 확대될 전망이다. NEC에 이어 도시바, 히타치제작소, 후지쯔 등도 연말까지 64MD램 생산량을 약 2배로 늘린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다. 단지 미쓰비시전기만이 최근 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반도체 사업 구조 개선 차원에서 당초 연말까지 월 5백만개로 목표했던 생산량을 월 1백만개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업체들이 앞으로 미쓰비시의 경우처럼 계획을 다소 하향 조정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발표된 대로 증산이 이루어지면 일본 주요 5사의 64MD램 합계 생산량은 3월의 월 1천7백50만개에서 연말에는 3천5백만개로 급속히 늘어난다. 이는 주요 5사가 계획하고 있는 올 연말 16MD램 합계 생산량의 2배에 상당하는 것으로, 일본 반도체업계의 16MD램과 64MD램 생산량 역전은 늦어도 올 중반께에는 이루어질 것이 확실시 된다.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전문가들은 일본 업체들이 64MD램 세대 교체를 서두르는 이유는 여름 이후 반도체 시황이 회복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64MD램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기반을 구축, 점유율 확대를 통해 수익성을 높여 16MD램에서의 부진을 만회한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특히 증산에 나서는 업체들은 64MD램 증산 경쟁은 16MD램과 달리 업체간 기술 격차가 뚜렸해 공급이 급속하게 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극단적인 공급 과잉이 이어져온 16MD램 시대와 달리 64MD램 시황은 16MD램 시황 악화의 주범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고속형 제품 생산 체제로의 전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 올 중반이후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미국의 일부 증권사 보고서를 통해 설득력있게 제기돼 왔다.
일본 5사 가운데 64MD램 증산에 가장 적극적인 NEC는 『64MD램의 약 90%는 가격 경쟁력이 유지되는 고속 제품으로 가격 붕괴에 휘말릴 위험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속 제품이란 미 인텔이 여름부터 출하를 시작하는 첨단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응하는 D램을 의미하는 것으로 NEC측은 자사와 한국 삼성전자 이외에는 양산이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표된 주요 업체들의 64MD램 사업 계획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인텔의 새로운 MPU에 대응하는 고급 PC용 64MD램으로 이익을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술력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같아 초기 시장에서 NEC와 삼성전자가 다소 이익을 확보하겠지만 그 기간을 길게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일본 주요 업체들의 이번 64MD램 대폭 증산에는 2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하나는 최대 시장인 미국 PC시장에서 1천달러 PC의 점유율이 50%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는 등 세계 PC시장에 저가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성능 PC를 타깃으로 하는 고속형 64MD램의 수요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난해 11월 통화가치 하락이 발단이 된 IMF쇼크로 한국 주요 반도체업체들의 투자가 대폭 축소될 것이라고 일본업체들이 판단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NEC는 이번 증산 발표 당시 증산의 한 배경으로 한국업체들의 반도체 부문 투자 축소와 이에 따른 생산 감소를 거론한 것으로 「일본경제신문」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64MD램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미 본격적인 생산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전략 사업의 하나로 64MD램을 책정, 사활을 건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1천5백엔 이하로 떨어진 64MD램 가격이 연말에는 1천엔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견해가 부상하고 있다. 게다가 주요 업체 가운데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전기 등은 97회계연도 반도체부문 적자가 수백억엔 규모에 이를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이 때문에 미쓰비시는 최근 적자가 계속돼 온 반도체부문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부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최악의 경우 64MD램 가격이 1천엔 이하로 떨어진다 해도 생산원가 절감을 통해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원가 절감 노력이 한층 급속한 가격 하락을 초래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경우 미쓰비시전기 처럼 반도체 사업 그 자체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게 일본 반도체시장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심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