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억압에 시달린 대신들은 일본측의 협정서 초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정도로 굴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정부회의가 끝나자마자 일본측은 곧 고종의 재가와 본국의 승인을 얻은 다음, 1905년 4월 1일 외부대신 이하영과 일본공사 임권조의 조인으로 한일통신협정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긴장된 마음으로 화재현장을 바라보았다. 화재현장은 이미 모든 정리가 끝나있었다.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1호 맨홀 부근에 놓여져 있던 통신케이블 드럼도 모두 치워져 있었고, 맨홀 입구에만 작업중이라는 안내표시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천천히 차의 속도를 줄였다.
화재가 발생했던 맨홀속에서는 아직도 많은 복구요원들이 손에 피가 맺힌 채 케이블 복구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한일통신협정.
우리나라의 통신권을 통째로 빼앗아간 한일통신협정은 10조로 되어있었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한국의 행정과 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미명을 내세워 궁내부(宮內府) 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사업권을 박탈하고 기존 통신사업에 관련된 토지와 건물, 기계 및 기타 일체의 설비를 빼앗고 앞으로 통신기관 확장이란 명목하에 조선의 토지와 건물을 마음대로 수용하며, 물자수입에 있어서도 면세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통신기관의 운영과 관리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독자적로 행할 것이며 따라서 조선 정부는 통신사업에 관해서는 일체 외국과의 교섭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완전히 그 자주권을 말살하였던 것이다.
협정서에서 궁내부 전화를 제외한다는 조문을 비롯한 몇개의 단서 등은 조선 정부의 요구에 의해 수정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측의 통신권 박탈이란 원래의 목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일본은 반환기한을 미리 명시하는 문제와 같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실질적 지배를 해칠 우려가 있는 수정안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밖에 한국인 관리의 채용과 앞으로 이익이 생기면 그것을 분배한다는 조문 등은 일제가 항시 우리를 기만하던 상투적인 문구의 하나일 뿐이었다.
「한일통신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조선 정부가 경영하던 통신사업권은 완전히 강탈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10여년 동안 치밀한 계획아래 추진해온 통신전쟁을 마무리짓는 것이었으며, 6개월 뒤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에 의해 조선의 주권이 피탈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