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단일통화체제를 확정함에 따라 국내 가전업체들이 대응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 기업들의 유럽 현지진출은 이제까지 주로 가전업체를 중심으로 확대돼 왔기 때문에 내년 1월 유럽통화동맹(EMU)의 출범을 앞두고 가전업체들이 높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가 됐던 습성대로 공연히 서두르기만 할 뿐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방향을 모르고 뛴다면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을 위해 현지에 진출했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원점에서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EMU 출범이 몰고올 파장을 폭넓게 살펴보기 바란다.
우리에게 IMF체제를 강제했던 외환위기가 동남아 통화위기로부터 예고됐음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통화위기 초반에는 당장 현지진출 기업이나 수출업체만의 관심의 대상인 양 무심했었다. 이미 세계경제가 울타리 없이 넘나드는 개방시대에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뼈아픈 경험을 유러화시대를 맞으며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EMU 출범에 앞서 가입국 간에는 서로 금리수준을 어느 정도는 맞춰야 할 필요가 있고 이미 덴마크와 스페인, 이탈리아가 금리를 조정했으며 독일도 미국과 손잡고 금리조정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독일의 조기 금리조정 움직임 때문에 프랑스는 비상이 걸렸다고도 한다.
유럽의 이같은 움직임은 미국의 달러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며 유러화가 머잖아 달러화와 더불어 세계 양대 기축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만 들여다 보고 있어서는 제대로 상황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로는 이제 더 이상 글로벌 경제시대의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당장 영국에 공장을 갖고 있는 기업들 사이에도 상황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EMU 가입을 유보하고 있는 영국의 금리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이며 그것이 현재 생산시설을 갖고 있는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국내의 대표적 기업들 간에 판단이 엇갈리는 모습이 보기에 불안하다.
물론 기업 내부사정들이 저마다 다를 것이니 상황이 자사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지는데 결론이 다르게 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현지금융 의존도가 높은 기업이라면 금리인상이 불가피해 보이는 생산현지 사정을 우려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거꾸로 현지금융 의존도가 낮은 기업이라면 앞으로 EMU체제가 안정되기까지 수시로 금리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을 가입국들에 비해 상대적인 금리안정을 기대하며 대유럽 생산거점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국내 기업의 진출양상이 값싸고 손쉬운 현지금융에 의존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현지의 금리조정이 대체로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는 그동안 국내 기업들의 유럽 현지진출이 현지금융을 일으키기 쉬운 선진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생산원가 절감에 따른 경쟁력 강화라는 목적은 치지도외했던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준다. 물론 무역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현지진출이기는 했지만 가격경쟁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회로는 진정 없었는지도 다시 살펴볼 일이다.
끝으로 국내적으로도 IMF시대를 겪으며 통감한 일이지만 막대한 금융으로 부풀려진 규모가 더 이상 기업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일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현지금융에 의존하는 진출은 재고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는 대체로 공동작업에 서투른 편이다. 그러다보니 해외에 나가도 단독진출만 생각할 뿐 손잡고 함께 진출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막대한 현지금융에 의존하는 단독진출보다는 국내 기업간 공동진출이나 현지 합작에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기채보다는 출자받는 쪽을 더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라는 것이다. 경영간섭이 우려된다며 독불장군식 경영으로만 치닫다 환란이 닥치면 속수무책이 되는 경험은 이제 IMF체제를 겪게 된 이 한번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