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국내 모뎀업계의 시선이 56kbps 모뎀에 집중된 가운데 주도권 확보를 위한 치열한 가격경쟁이 업계를 고사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모뎀제조업체들의 관심이 56kbps 제품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56kbps 모뎀이 통신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킬 수 있는데다 인터넷이나 PC통신상에서 주고받는 데이터의 양이 커짐에 따라 이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고속모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내 모뎀시장은 고속화 현상이 급진전되면서 기존 시장을 주도해온 33.6kbps 모뎀시대를 벗어나 이보다 데이터 전송속도가 두 배 가량 빠른 56kbps 제품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세계 모뎀시장도 56kbps 제품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고 그 비중이 점차 커질 것으로 관련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특히 56kbps 모뎀 보급에 걸림돌로 작용해 오던 표준문제가 올 초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의해 해결됨에 따라 세계 모뎀시장은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결과 모뎀제조회사뿐 아니라 정보서비스업체들의 잇따른 시장참여도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내 모뎀제조업체들의 가격경쟁은 「56kbps 모뎀시대」를 무색케 할 정도로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용산전자상가 등에서 한달 전까지만 해도 개당 평균 8만원대에 판매되던 내장형 56kbps 모뎀의 소비자 가격이 지난달 말 6만원대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이달 들어서는 5만원대 수준으로까지 급락하고 있으며 이같은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관련업계는 이에 대해 지난달 일부 업체가 신형 칩세트를 채용한 v.90 모뎀을 구형 제품보다도 2만원 정도 싼 가격으로 공급하면서 촉발됐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수요부진이 몰고 온 경쟁심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현재 이들 업체의 가격경쟁은 이미 마케팅 차원을 넘어 업체간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시장붕괴를 감수하더라도 끝을 보겠다는 극언마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모뎀제조업체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성능이 평준화된 모뎀시장에서 경쟁사 제품보다 몇 천원만 비싸도 매출이 급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즘과 같은 가격인하 경쟁을 따라가다가는 버틸 수 있는 업체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벌써부터 일부 모뎀업체는 생산량을 줄이거나 아예 소매시장을 포기하고 있다. 또 수출에 전념하는 등 나름대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으나 모뎀업계 전반의 채산성 악화는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최근의 모뎀제조업체간 가격경쟁은 유통업계에도 큰 주름살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IMF사태 이후 수요부진이 심각한데다 예년보다 일찍 시작된 비수기를 맞아 재고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인데 최근엔 제조업체의 출혈경쟁으로 저가의 모뎀이 시중에 대량으로 흘러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도매가격 이하로 판매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같은 사정으로 말미암아 최근 모뎀업계 주변에서는 이미 성능이 평준화된 모뎀시장에서 가격이 유일한 경쟁요소지만 가격경쟁으로 인해 시장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상황만은 피하자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제살깎아먹기 식의 가격경쟁 행위는 반드시 지양돼야 한다. 모뎀을 개당 5만원 이하로 「길바닥에 뿌리는 장사」는 사라져야 한다. 좁은 내수시장에서의 출혈경쟁보다는 수출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체의 모뎀 연간 총생산량이 대만의 아즈텍이나 E테크와 같은 기업의 한달치 수출물량에도 못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국산모뎀의 수출확대 가능성은 아직도 많은 편이다. 수출에 나서는 업체들이 생존할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복잡한 통신망 체계 덕분에 악조건에서도 높은 성능을 내는 우리의 모뎀 설계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며 모뎀 칩의 업계 공동구매 등을 통해 국산모뎀의 가격경쟁력을 제고한다면 수출시장에서 지금보다 월등한 성과를 올릴 것이다. 대만 모뎀업체들이 기술력에서 우리 업체보다 나은 점은 별로 없다. 그동안 국내 모뎀시장은 전통적으로 기술보다는 가격이 주도해 왔지만 앞으로는 기술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모뎀시장이 다시 과거의 시스템으로 돌아가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