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컴의 "한글" 사업 포기

한글과컴퓨터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1천만 달러 이상의 투자를 전제로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 차기 버전의 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것은 90년대 들어 국내 소프트웨어(SW)산업계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구나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치열하게 경쟁했던 미국 MS사의 자본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국내 SW산업계는 물론 일반 컴퓨터 사용자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우선 한컴의 「아래아한글」사업 포기결정은 국내 SW산업의 마지막 보루라 여겨진 워드프로세서마저 외국에 내주게 됐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한컴이 「아래아한글」의 차기 버전 개발을 중단키로 함에 따라 국산 SW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아래아한글」은 앞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따라서 국내 워드프로세서시장은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인 MS의 손에 좌우되면서 「MS워드」 독점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컴퓨터업계의 관계자들이 이번 결정을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래아한글」이 내포하고 있었던 우리 고유문화의 상징성을 잃게 됐다는 자존심의 문제와 함께 향후 벌어질 시장상황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컴퓨터 사용자들은 한컴이 그나마 버텨줬기 때문에 워드프로세서를 값싸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 「MS워드」만 남은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당연히 MS가 워드 및 오피스 무상공급 등 그동안 취했던 관대한 정책을 계속 끌고갈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번 「아래아한글」사업의 포기로 국내 워드프로세서시장은 한컴과 MS의 과점화 상황에서 MS의 독점상황으로 급속히 바뀌게 될 것이다. 국내 워드프로세서시장의 점유율을 시장구조별로 보면 일반소비자 시장에서는 「아래아한글」이 약 60%, 「MS워드」가 3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을 비롯해 「아리랑」 등이 10%를 차지해 왔고 기업시장에서는 「아래아한글」이 약 15%, 「MS워드」가 80%, 「훈민정음」 등이 5% 정도의 점유율을 차지해 왔기 때문에 한컴과 MS가 사실상 국내 소비자시장과 기업시장을 양분해 왔지만 앞으로는 「MS워드」의 완전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이에 따라 국내 컴퓨터업계는 매년 엄청난 액수의 로열티 지불이 불가피하게 됐으며 그룹웨어 등 다른 SW분야의 위축 등 그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컴의 이번 결정이 충격적인 것은 열악한 한국 SW산업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한컴이 「아래아한글」과 「한글과컴퓨터」라고 하는 명분과 실리 중에서 마침내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선택한 것은 불법복제와 덤핑 등으로 얼룩진 우리 SW업계가 처한 열악한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크다.

물론 그동안 한컴은 기술개발을 게을리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찬진 사장 스스로도 경영을 소홀히 했다는 점을 시인했다. 또 사용자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사후관리가 뒤떨어진다는 컴퓨터 사용자의 지적을 외면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한컴은 「아래아한글」사업부문을 포기하는 대신에 「아래아한글」을 개발해온 기술과 인터넷을 접목하는 분야를 주력사업화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래아한글」개발 주역으로 찬사를 한 몸에 받아온 만큼 「아래아한글」 매각에 대한 애석하고 서운함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제 「아래아한글」을 기반으로 국내 최대의 SW회사를 설립, 한국의 빌 게이츠로 떠올랐던 「이찬진 신화」는 「아래아한글」의 시장 퇴출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지난 89년 「아래아한글 1.0」이 개발된 이후 만 9년 동안 「MS워드」와 대결하면서 한국 SW산업의 자존심을 지켜온 「아래아한글」이 그 깃발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앞으로 과제는 한컴과 MS가 「아래아한글」의 퇴출에 대해 국산SW 자존심의 몰락으로 여기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국내 컴퓨터 사용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메워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