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구조조정의 몇가지 전제

그동안 무성한 말잔치 속에 일반인들에게는 실체가 잘 보이지 않던 산업 구조조정이 1차 퇴출기업 발표로 첫 단계의 모습을 드러냈고 머잖아 재벌그룹간 빅딜도 구체적 내용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돼 기업이나 개개인들에게 닥쳐온 엄청난 회오리가 더욱 분명하게 실감될 것으로 보인다.

청산, 매각, 인수, 합병, 상호교환 등 다양한 형태로 기업의 운명이 갈리는 만큼 해당 산업계에 큰 파장이 미치는 것은 물론 그 기업과 관련된 개개인들의 삶에도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같은 일련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정부가 상당한 저항에 직면하는 것 또한 불가피할 것이다.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정부가 이처럼 인기없는, 따라서 비정치적이기도 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고 한번쯤은 산업구조를 추스렸어야 했으나 곧이은 또 한번의 군사쿠데타로 그같은 기회를 상실한 채 부채로 덩치를 키운 대기업이 그 덩치를 바탕으로 또다시 부채를 늘려 덩치를 더 키워가는 악순환이 지속돼 왔다. 몇 차례 개혁을 피한 채 악순환을 되풀이해온 결과 부풀대로 부푼 거품과 환상이 깨지며 IMF관리시대로 전락한 것이다.

IMF관리는 그동안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줄만 알았던 국민적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으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또다시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바닥난 외환보유고를 채우기 위해 대통령이 나서서 외채를 꾸러 다닐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투자여력이 없으면 남의 돈을 빌려서라도 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빚은 단지 빚일 뿐이다. 그 빚은 갚을 여력이 있을 때는 우리를 살리는 자산이 되지만 빚 갚을 능력이 없을 때는 곧바로 족쇄가 되고 빚이 빚을 부르는 악순환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쟁력을 높일 산업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현재 재벌을 포함한 대기업 경영진들도 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총론에는 찬성, 각론에는 반대」라는 식으로 저항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빅딜은 아직 주춤거리고 정부는 대통령을 내세워 반은 협박성 권유를 하고 있다.

정부의 재벌기업간 빅딜은 기업과 기업인을 동일시하는 봉건적, 전근대적 기업체질을 현대적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중요한 계기가 되겠지만 그보다도 실상은 주요 산업의 외국자본 지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부는 산업 구조조정을 두 개의 축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는 앞서 열거한 민간기업 차원의 구조개혁이고 또다른 축은 공기업의 민영화 추진이다. 민간기업의 구조조정은 해당기업과 관계인들의 저항이 문제가 된다면 공기업 민영화는 불안한 국민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한국전력과 같은 공기업 자산의 해외매각 논의는 국민에게 어쩔 수 없이 1백여 년 전의 철도부설권, 광산개발권 양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대중적 정서를 단지 배타적, 폐쇄적 정서로만 몰아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공기업은 산업발전의 기반인 동시에 국민복지의 필수적 요구인 우리 사회의 기반 인프라를 담당해 왔다.

그같은 공기업의 민영화가 그나마 빈약한 국민복지 수준의 후퇴로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불안, 거기에 더해 사실상 독점상태인 공기업 산업 분야의 외국자본 영입이 국내 산업의 종속을 초래할 것이라는 관련기업들의 우려까지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 상황에서 산업의 구조조정이 필수라면 국민복지 증진과 안정적인 산업의 기반 인프라 확보 또한 당위다. 민영화, 해외자본 유치 등 자본배분 방법에서 좀더 체계적인 검토가 요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