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업계의 외자 유치가 마치 급류를 탄 것처럼 급진전되고 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과컴퓨터 출자를 둘러싸고 촉발된 「불평등 계약」 논쟁에서 보듯 현재 국내 기업에의 투자를 추진중인 대부분의 외국 기업들이 「불평등한 계약조건」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외자 유치만이 살 길이라며 허겁지겁 외국인 접촉에 나섰던 정보통신업계가 막상 계약체결 단계에서 이들의 무리한 요구에 시달린다는 사실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경제 자체가 부도의 위기로 내몰리면서 어쩔 수 없이 맞게 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아래서 기업들이 재무구조 보강과 대외 신인도 제고에 나서는 것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당위라고 할 수 있다. 취임 전부터 환란위기를 슬기롭게 헤쳐온 것으로 평가받는 김대중 대통령도 한국이 IMF체제를 초래한 것은 외국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것이 아니라 「빚」을 끌어왔기 때문이라고 그간의 무분별한 차입경영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이같은 정책 기조는 국민적 동의하에 추진되고 있다. 대통령과 수많은 기업인들이 미국을 방문, 가시적 성과를 보인 것은 이같은 정책이 이끌어낸 청신호로 보아도 좋은 사례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따질 것은 따지고 잴 것은 재야 한다. 특히 기간통신 분야를 포함한 정보통신산업은 국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클 뿐 아니라 향후 우리 경제 회생의 견인차가 된다는 점에서 관련기업의 외자 유치에 좀 더 신중한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외자 유치에 급급한 나머지 누가 봐도 수긍할 수 없는 헐값에 지분을 내다 팔거나 불평등 계약을 수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현재 국내 주요 기업의 자산가치는 주식을 기준으로 할 때 지난해 초에 비해 20%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에 1백억원을 줘야 인수할 수 있었던 기업이라면 지금은 20억원만 들이면 간단히 「접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외국인들이 투자에 나설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외국인 투자는 아직 부진하다. 정부 분석으로는 주요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가격이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 관리들이 나서서 지금 투자해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냉엄한 자본의 논리를 앞세우는 외국 투자자들에겐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이같은 한국 기업의 처지를 악용, 일부 외국인 투자자들은 단지 헐값에 지분을 매입하는 수준을 벗어나 시장독점을 위한 불공정한 계약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한글과컴퓨터사에 대한 투자가 사회문제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인의 정서를 외면한 채 시장독점을 겨냥한 「불공정한 계약」을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성격의 외자가 계속 유치될 경우 그나마 국민적 합의를 본 시장개방의 분위기에 제동이 걸리며 국수주의적 논리가 사회 분위기를 압도할 위험도 있다.
이미 투자의사를 확정하고도 집행을 미루는 일부 투자자들은 정부 차원의 투자 위험보장을 요구하는가 하면 매각 대상 국내 기업의 값을 장부 가격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후려치는 사례, 협상을 질질 끌어 하루하루가 다급한 국내 기업의 덤핑매각을 유도하는 사례 등이 거론되며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
현재의 우리에게 외국인 투자 유치는 절실하다. 그러나 외자 유치는 그들 투자자에도 도움이 되고 우리 기업도 사는 윈-윈 방식이 돼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기업들이 더 이상 몸값을 구걸해서는 안된다. 외자 유입은 앞으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것이지 당장의 고통을 덜기 위해 마약을 주사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당장의 환란위기 탈출을 서두르다 IMF로부터 최악의 조건으로 당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 없다.
기업들은 몸값 올리기 노력부터 해야 한다. 그러자면 구조조정을 선행, 기업구조의 효율성을 높이고 전망있는 기업으로서 저들에게 투자 메리트를 줘야 한다. 급하다고 또 한번 빚만 끌어올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