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71)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K호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호텔 벽면에 붙어 있는 대형 전광판에는 일본의 통신망에 장애가 발생했다는 뉴스 속보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김창규 박사. 제 시간에 제대로 침투한 것이었다. 모든 전화번호 데이터가 바뀐 일본의 혼란상황을 상상하며 김지호 실장은 그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단한 친구.

그 친구는 지금 일본행 비행기 속에 있을 것이다.

NTC의 통신망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그 친구가 일본으로 출국한다는 소식은 경찰서 조 반장한테 들었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친구의 범죄를 확인할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김지호 실장과 김창규 박사, 단 둘뿐이다. 그 친구를 광화문 네거리 맨홀 화재사고와 살인, 50억이라는 현찰을 은행에서 불법 인출한 범인으로 모는 것보다는 더 큰 게임을 위해 묻어두었다. 그 게임은 힘이다. 중국 통신시장 확보를 위한 힘이다. 그 힘을 위해 덮을 것은 덮어야 한다. 하루 동안의 게임. 하루가 지나면 장애는 자동 회복될 것이다.

호텔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일본의 통신망 두절에 대한 속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통제실에 들러 일본 쪽으로 송신되는 모든 회선을 차단시키고 장애안내를 위한 녹음을 지시한 것은 김창규 박사로부터 침투완료라는 연락을 받았던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 친구, 금고를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김지호 실장은 그 친구의 금고 속에 넣어두었던 통화내역을 떠올렸다. 그 친구의 결정적인 미스. 그것은 전화 통화기록이었다. 현금이 인출되던 날, 그 친구의 알리바이는 외부에서 통화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전화교환기의 특수서비스 중에 호전환기능을 부여받으면 송도의 그 친구 연구실로 걸려온 전화가 지정된 다른 전화로 자동 전환되도록 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현금인출에 관여하면서 송도 연구실 전화번호를 휴대폰 전화로 호전환을 시켜놓고 전화통화를 하여 알리바이를 확보했던 것이다.

약속된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기다리고 있던 은옥과 현미, 그리고 아이들이 반겼다. 김지호 실장은 아이들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는 현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제도 고생 많았지? 아이들 돌보느라고.』

『아니에요. 형부가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래, 장례는 잘 치뤘나?』

『네, 잘 치뤘어요.』

현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옥이 말했다.

『여보, 일본 통신망이 다 마비되었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