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72.끝)

일본의 통신망에 장애가 발생했다는 은옥의 말에 김지호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컴퓨터 바이러스 방지를 위한 방호벽 이야기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참, 아까 확인해 달라는 전화번호는 어떤 거예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전화요.』

전화 통화내역. 게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자료. 은옥에게도 그 친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예약된 자리. 맨홀에서 화재가 나던 날에는 예약을 해놓고 경황이 없어 취소도 못했었다. 식당 창밖 길 건너 신문사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도 일본의 통신사고에 대한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그 속보를 보면서 그 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결론은 그 친구였다. 지금쯤 대한해협을 건너고 있을 그 친구였다.

아직도 의문점은 많다. 혜경의 정확한 사인과 서해안 방조제에서 죽은 조선족, 두 개의 촛불 심지까지도 의문이었고, 승민이라는 친구의 소설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친구가 범인이라는 사실이다.

범인. 범인. 범인. 김지호 실장은 범인이라는 단어를 몇 번 되뇌어 보다가 그 친구 스스로는 자신이 게임의 주관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게임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게임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것을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게임이 진행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다. 늘 온라인 상태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없듯이 오프라인 상태도 필요하다. 자신만의 게임을 위한 맨홀과 같은 폐쇄공간이 필요하듯이 그 맨홀 뚜껑을 닫아줄 장치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체도 게임일 수 있는 것이니까.

김지호 실장 자신도 이번 사건을 접하는 순간 순간마다 게임으로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중국 통신현대화사업의 사업권 획득을 위한 게임. 이제 일본과의 조건도 같아졌다.

『여보, 술 한잔 하셔야지요?』

『술? 중국에서 먹었던 죽엽청주(竹葉淸酒) 괜찮던데.』

그때였다. 김지호 실장의 휴대폰에 벨이 울렸다.

「창밖의 전광판을 보시오.」 그 말뿐이었다. 기계음 이었지만, 아주 또렷이 들렸다.

김지호 실장은 고개를 돌려 창밖 길건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화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큼지막한 글씨였다.

졌다.

하지만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