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반도체업체 NEC가 지난달 초 급작스럽게 D램 생산계획을 하향조정한 배경을 놓고 업계 전문가들은 「대량생산을 통한 경쟁력 강화 전략이 장벽에 부딪힌 것」이라며 NEC의 향후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D램은 지난 96년 가격폭락 이후 최근까지 수익성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는 품목이다. 따라서 D램 생산감축은 일본 반도체업계에서는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NEC의 D램 하향조정 발표에 대한 일본 D램업계의 관심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그 이유는 NEC가 최근까지 일본 반도체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공격적 경영을 통한 반도체 불황 극복을 표방해 왔고 그런 NEC의 독주를 다른 경쟁업체들은 두려움과 부러움으로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NEC의 D램 생산 하향조정안은 현 주력제품인 64MD램 생산과 관련해 올해 12월까지는 현재의 월 8백만개에서 1천만개로 확대한 뒤 더 이상의 증산을 단념한다는 것과 수익성 악화의 주범인 16MD램은 현재 월 6백만개인 생산규모를 올 연말까지 2백만개로 대폭 줄여 수익악화를 최소화한다는 것이 골자다. NEC는 16MD램의 경우 당초부터 생산량을 축소한다는 잠정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64MD램과 관련해서는 내년 중반까지 생산규모를 1천5백만개 이상으로 끌어올릴 방침이었다.
NEC의 사사키 하지매 부사장은 하향조정안을 발표하면서 『당초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좋다』고 밝혔다. NEC가 느끼고 있는 대표적인 불안 요인은 역시 6월 전격 결정된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 반도체부문 인수. NEC가 대대적인 D램분야 투자확대를 공식 표명한 뒤 한달도 안돼서 불거져 나온 이 사건으로 NEC는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마이크론이 TI의 아시아지역 반도체 생산거점 가운데 하나인 일본 고베제강소와의 D램 합작회사 KTI세미컨덕터를 그대로 인수하면서 약 2백억엔을 신규 출자해 내년부터 64MD램을 월 1천만개 규모로 생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이제 아시아시장도 마이크론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게 됐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러나 하향조정 당시 대부분의 일본 D램업체들은 높은 투자 부담과 시황악화를 이유로 D램사업 축소를 공식 표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D램의 실거래가격도 전세계적으로 다소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NEC의 D램 하향조정이 전적으로 경쟁업체들의 양산이라는 외적인 요인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즉, 외부요인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그 실질적인 이유로 제기되는 것이 NEC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 합작공장. 내년 가을 양산을 목표로 하는 이 합작공장은 중국 정부가 하이테크산업 육성 프로젝트의 하나로 건설하고 있는 총사업비 1천8백억엔 규모의 대형 D램 공장이다.
이곳에 약 30%를 출자하고 있는 NEC는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D램을 전량 구입하기로 돼 있어 공장 가동을 빠르게 정상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새 공장은 내년 가을부터 월 2백만∼3백만개 규모로 64MD램을 양산한다. 거액이 투자된 만큼 설비감가상각비 부담도 크기 때문에 가동률을 낮출 수는 없다. 오히려 중국 상하이공장을 D램 거점으로 본격 육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D램공장의 양산규모를 낮춰 나갈 필요가 생긴 것이다.
사실 이번 D램 감축안과 동시에 발표한 NEC야마가타의 새 시스템 온 칩 공장 가동 연기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새 공장 가동을 연기함으로써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동시에 생산하고 있는 NEC히로시마공장의 비메모리 제품 생산량을 확대해 가동률 하락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사사키 부사장은 『지난해에도 한국 삼성전자에 이어 D램부문 2위 점유율을 확보했으나 현재로서는 점유율이 떨어진다 해도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번 결정으로 NEC의 세계 D램시장 점유율이 당초 계획보다 크게 떨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NEC의 반도체사업부문은 그 규모만큼이나 무거운 설비투자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 국내 2위인 도시바는 국내외에 4개 생산거점을 두고 있는 반면 NEC는 국내·미국·유럽·중국 등에 6개의 생산기지를 마련해 놓고 있어 생산설비가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타사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설비투자비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거액의 투자비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빠르게 양산해야 하지만 현재 D램에는 큰 기대를 걸기가 힘든 상황이다. 특히 D램을 고집할 경우 최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시스템 온 칩 사업 강화에도 자칫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NEC는 지난해 반도체사업에서 5백억엔이 넘는 흑자를 기록하면서 경쟁업체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사실 하반기 흑자는 20억엔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올해 이후 시황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NEC는 무리한 투자보다는 반도체 사업 전략을 조율하면서 시장상황에 맞춰 나가는 경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D램 생산계획 하향조정이 그 첫 단추가 된 것이다.
아직 향후 전략에 대한 NEC의 공식적인 계획이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중국 상하이공장을 D램 사업의 본거지로 삼아 D램 가격 경쟁력을 높이면서 국내공장 D램 감축에 따른 여유라인을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투입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