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의 해외 현지법인 경영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최근 수출입은행 산하 해외경제연구소가 총 6백30개의 해외 투자법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들 해외 현지법인의 공장가동률이 지난 5월 기준 평균 55.1%에 불과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같은 낮은 가동률 수준은 올들어 국내 제조업체들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작업이 한창일 때의 가동률인 66.7%에도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어서 해외 현지법인들의 경영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조사보고서는 특히 경영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 현지법인은 절반 수준도 안되는 43.2%에 불과하고 나머지 38.8%가 이미 경영상태가 불안하거나 불량징후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 부실 현지법인의 양산이 우려된다는 지적은 가히 충격적이다.
IMF 사태 이후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국내 모기업들의 경영지원이 줄고 현지여건마저 어려워지면서 발생한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특히 글로벌화라는 기치아래 전세계에 판매 및 생산법인의 건설을 앞다퉈 추진해 왔던 가전업계로선 이같은 해외 현지법인의 경영부실이 모기업의 경영부실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LG전자·대우전자 등 가전3사는 그동안 해외시장의 블록화에 따른 무역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또는 고임금·고비용 구조에 적합하지 않은 저부가 제품의 채산성 확보를 위해 해외진출을 서둘러 왔다. 그 결과 작년 말 현재 가전3사는 65개 생산법인을 비롯해 판매·서비스·물류 부문 등에 총 1백33개사의 현지법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현지법인에 투자한 금액이나 생산설비·인력 등도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외 법인들이 지난 95년 이후 세계화 붐을 타고 집중적으로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아직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전업계의 해외 법인 중 지난해 흑자를 낸 곳은 전체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며 그나마 흑자폭도 매우 미미했다는 작년 말 결산실적은 이를 증명한다.
이같은 수치도 IMF 이후의 극심한 경기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올해 가전업계 해외 현지법인들의 상황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IMF와 함께 올 하반기부터 불기 시작한 세계적인 금융불안으로 세계 도처의 시장이 위축돼 해외 법인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가전업계가 그동안 공들여온 전략적인 해외 법인들이 이번 세계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아 철수나 폐쇄를 고려할 정도의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CIS·브라질지역의 내수경기가 사라지고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하면서 이 지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던 가전3사로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처럼 심각한 데도 가전3사는 아직까지도 발등에 불인 모기업의 구조조정에만 매달린 채 해외 법인의 구조조정에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올들어 일부 업체들이 가전 생산라인을 정보통신기기 생산라인으로 전환하거나 공장가동률을 축소하고 인력을 줄이는 등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이같은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해외 법인들의 폐쇄나 철수 등은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카드지만 이것은 앞으로 현지시장을 포기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마지막 선택이다. 이같은 선택에 앞서 해외 현지법인들 스스로가 가전제품 생산라인을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라인으로 전환하거나 현지시장 위주에서 수출중심의 사업구조로 바꾸려는 노력 등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본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강력한 구조조정만큼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해외 현지법인들의 구조조정은 급변하고 있는 세계 경제질서에 걸맞게 장기적인 계획아래 추진돼야 하며 일단은 수익성을 올릴 수 있느냐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부실한 해외 현지법인들을 살리기 위해 본사에서 「깨진 독에 물 붓기식」의 과거와 같은 투자정책은 이제 과감히 포기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