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기용품·정보통신기기(정보기기·통신기자재·무선기기)·기계·자동차·의료기기 등 기기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그동안 각각 다른 근거법과 절차, 방법으로 제조 및 판매를 규제해온 우리나라의 다양한 품질인증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정부의 이같은 구상은 최근 선진 각국이 유럽연합(EU)과 아·태경제협력체(APEC)를 중심으로 이른바 「다자간 상호인증협정(MRA)」 체결을 서둘고 있는 데 대한 대응방안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지만 지난 수십년간 존속해온 여러 가지 품질인증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할 것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MRA란 선진 각국이 제각각 안전·보건·환경 및 소비자보호 등을 목적으로 정한 규제품목들에 대한 적합성 평가(Conformity Assessment)를 양자간 또는 다자간 협정을 통해 서로 인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역촉진을 실현해 나겠다는 것인데, 세계무역질서가 종전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에서 상품·서비스·지적재산권 등의 완전한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로 전환되면서 이같은 무역장벽 제거방안은 더욱 활발하게 논의돼왔고 최근 들어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MRA를 무역과 투자에 대한 불필요한 규제장벽을 제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 MRA 협정체결을 강조하고 있고 APEC에서는 한술 더떠 MRA 외에 국제규격의 일치화, 기술 하부구조 개발, 투명성 제고 등 보다 근본적인 분야까지 협력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선진국들이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기술규정을 제정·운용하면서 실질적인 무역장벽을 강화하는가 하면 국제표준의 제정 및 적용범위의 확대 등 다양한 안전장치를 강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EU는 전기제품·통신기기·의료기기 등 21개 분야에 대한 유럽인증(CE) 마크 부착을 의무화한 데 이어 최근엔 전자제품에 대한 추가실시로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에 대한 시장확대를 더욱 어렵게 하는 등 선진국의 장벽은 더욱 높아만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한 만큼 정부나 시험·검사기관 및 업체들의 MRA에 대한 구체적이고 면밀한 준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EU간 MRA 체결 본협상 일정이 당장 내년 초로 예정돼 있어 그 이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내 품질인증시스템의 제도정비에 대한 기본골격을 마련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정부가 이와 관련, 국내 관련 품질인증시스템을 통합하는 등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아래 정부부처와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상호인증대책반 또는 무역기술장벽대책반 등을 운영하면서 국가적 전략수립에 나서고 있는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의 실현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우선 MRA 협정체결을 위해서는 협정 당사국간의 일치된 규격을 확보해야 하고 또 일치된 규격을 갖고 있더라도 시험성적서·인증서 등 적합성 여부를 판정하는 적합성 평가에 국가간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다는 것이 우선 큰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국내 적합성 평가기관이 특정부처의 산하기관으로 운영됨에 따라 비경쟁적인데다 조직과 인력, 절차 등이 국제적 기준에 낙후돼 있어 신뢰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보건복지부·노동부 등 품질인증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관계부처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한데다 부분통합이든 완전통합이든 관련기관과 산업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커 부처간 의견수렴이나 법 제정 및 개정작업 과정에서 적잖은 마찰이 예상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기기별로 적용법규나 인증시스템, 소관부처가 다른 현 상황에서 이를 통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시간이 촉박한 만큼 부처간의 이해관계를 떠나 국익을 우선하는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품질인증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