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기업의 자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일정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국내 영상산업계에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첫 단계로 영화·비디오·출판 부문을 즉시 개방하고 음반 및 방송 분야의 개방일정은 향후 일본과 공동으로 구성될 「한·일 문화교류 공동협의회(가칭)」에서 논의해 마련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애니메이션과 상업영화는 제외됐다.

 정부의 이같은 개방일정과 내용은 그동안 쏟아져 나왔던 각계의 기대와 우려에 비추어 본다면 밋밋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비록 일본 영화의 수입상영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우선 당장 개방되는 영화는 △한·일 공동 제작영화 △칸·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 영화제 등 4대 영화제 수상작 △한·일 영화주간을 통해 공개된 영화 등으로 제한하고, 비디오의 경우도 이들 수입영화에 한해서만 제작을 허용하겠다는 등의 단서조항을 달고 있다.

 이는 문화관광부의 입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서 천명한 「개방」의 대원칙을 지키면서도 「국민정서를 해치지 않고 경제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국내 영상시장은 사실상 완전 개방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 88년 미국 영화사들에 직접배급 등을 허용한 이후 만 10년만의 일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영향은 미국 영화직배사들의 진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거리적으로 가깝고 생활양식도 비슷하다는 점 외에도 일본은 「상업화」 측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청소년들은 그들의 문화 상업주의에 푹 빠져 있고, 흔히 「연예」라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부문은 일본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다. 개방일정이 의외로 앞당겨질 경우 주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기반조차 흔들릴 수도 있다.

 물론 우리 정부도 이에 대응, 내년부터 5년간 총 5천억원의 문화산업진흥기금을 조성, 게임·애니메이션·음반·영화·방송영상산업을 5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2003년까지 게임종합센터·방송영상사업단지·첨단문화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등 국내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적극 배양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산업계가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내 대기업들과 중견기업들은 수년 전 멀티미디어 콘텐츠로 대표되는 영상산업의 장밋빛 환상 만들기 바람에 자극받아 영화·비디오·음반·게임을 비롯한 영상산업에 경쟁적으로 달려들면서 국내 업체간 과열경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과정에서 치솟은 판권료는 금융대란과 IMF 구제금융 한파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됐다.

 그런데 최근 일본 대중문화 가운데 영화와 비디오를 우선 개방한다는 정부의 발표 이후 벌써부터 후속 개방조치에 대비해 일본 영상물 확보경쟁을 벌여 판권료가 급등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기업의 속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IMF 구제금융체제에 들어선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전철을 밟으려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국내 업체들이 효과는 더디게 나타날지 몰라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는 부분에 힘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쌓기란 요원하다.

 반도체나 영상산업 등 흔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산업들은 알을 제대로 낳을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먹이를 주고 기르는 노력과 이 과정에서 쌓는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노하우가 인수와 사재기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경제위기와 대일 문화개방으로 어려워진 지금, 신념을 갖고 끈기있게 투자를 해 나가는 기업상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