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상황 바뀐 "반도체 빅딜"

 반도체 사업 구조조정(빅딜)에 대한 무용론이 널리 퍼지고 있지만 정부는 지나치리만치 경직된 자세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주체인 재벌에 대해 개혁을 요구한 것은 외환위기로 인해 어려워진 경제를 살리고 우리의 산업 체질을 바꾸자는 뜻이 담겨 있음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래서 5대 그룹은 7개 업종에 대해 구조조정을 실시, 6개 업종을 마무리했으며 다만 반도체는 해결짓지 못하고 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통합하기 위한 빅딜이 시간을 끌며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부당함 때문이다. 이미 산업계를 비롯한 반도체협회·학계·법조계 등 각계의 전문가들이 반도체 빅딜의 무용론에 거의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지난 10일 열린 산자위 국정감사에서도 현대와 LG의 빅딜은 부당하다고 잇따라 지적돼 주목을 끌었다.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은 『최근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반도체가 오는 2000년에는 대규모로 공급부족 현상을 보일 것으로 전망돼 반도체 회사 통합은 안된다』고 주장했고 자민련 김칠환 의원도 『현대와 LG는 이질적인 공정과 설비를 지니고 있어 통합하더라도 시너지 효과가 없으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고 있어 빅딜의 최대 수혜자는 외국의 경쟁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정부의 입장은 마치 못을 박아 놓은 듯 전혀 움직임이 없으며 「빅딜 무용론 불용납」이란 기치를 더욱 높이 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은 9일 기자 간담회에서 『반도체 부문 일원화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며 『만약 올 연말까지 마무리되지 않으면 내년 초부터 여신중단을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 박 장관은 『세계 경기부진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은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내년에만 1조원을 투자해야 하는 등 과잉투자 성격이 강해 구조조정이 강력히 요구되는 업종』이라며 『항간에 나도는 구조조정 불가론은 절대 안될 말』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도 4일 능률협회 주최로 열린 최고경영자 특별 세미나에서 『LG와 현대의 통합은 인력감축과 감산 등을 통한 구조조정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사실 정부가 반드시 여론을 좇아 정책을 펴 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의 식견으로 소신껏 정책을 수립, 시행하면 된다. 그러나 이번 반도체 빅딜의 경우 정부가 당위성에 대한 소신이나 비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욱이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반도체 분야 빅딜 근거로서 과잉·중복투자 문제는 최근의 경기상황을 볼 때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과당경쟁을 벌일 수 있다는 지적은 반도체 산업이 생산량의 90%를 수출하는 수출 주종품목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내수시장에서 과열경쟁을 벌일 소지가 거의 없고, 수출시장에서도 최근 경기가 호전되고 있어 힘을 잃고 있다. 세계적으로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으며 가격도 지난 5월 말 최저 7달러였던 64MD램이 최근 10.77달러로 올랐다.

 이에 따라 반도체 업체들은 일제히 지난 5개월 동안 매월 7∼10일씩 가동을 중단했던 라인을 이달 들어 풀가동하고 있다.

 이제 반도체 산업 환경은 정부가 빅딜을 제안했던 불과 두달 전과 판이해졌다. 지금도 국내 유망한 사업 분야에는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투자를 해서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다면 반도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가 굳이 반도체 빅딜을 이루고 말겠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것은 규제완화를 주창하는 정부의 색깔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어쨌든 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전경련은 양사를 통합하기 위한 외부 평가기관을 선정했지만 이달 말까지는 불과 2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경영주체를 제대로 결정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대로 간다면 내용이나 과정은 어떠하든 간에 책임경영주체는 결정되고 양사 통합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 결과는 빅딜 무용론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국가나 산업은 물론 정책 시행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반도체 빅딜은 결자해지 원칙에 따라 정부가 맺었으니 풀어야 하는 것도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