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여야의 첨예한 시각차만 노출한 채 처리가 계속 미뤄지면서 표류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기간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한도를 내년 1월1일부터 49%까지 확대한다는 내용.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와 체결한 협정에는 국내 기간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을 오는 2001년부터 49%로 확대키로 돼 있으나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감안하고 외자유치를 조기에 성사시키기 위해 이를 2년 앞당긴 것이다.
문제는 당연히 처리될 것 같았던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정치권으로 넘어가자 방향을 잃고 표류한다는 데 있다. 사실 정부의 개정안은 지난 여름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예정이었으나 외국인 지분한도 부분만은 의원입법 형식으로 통과시키자는 여야의원들의 요구로 이번 정기국회에 넘어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안 통과가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이를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가 열렸는데도 여야간 논란만 거듭한 채 뚜렷한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법을 제정하는 국회에서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는 데 찬성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를 골자로 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는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전세계를 상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올해초 정부는 외자유치를 통해 이를 극복하겠다는 정책방향을 설정하고 그 구체적인 대안으로 기간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을 2001년보다 2년 앞당겨 49%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정부의 이같은 방침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타전됐고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을 외국인이 투자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천명,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이같은 여건 때문에 브리티시텔레컴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다퉈 대한투자에 나섰고 최근에는 주요 외국기업들로 구성된 투자회사 캘러헌도 5천억원 규모를 한국에 투자키로 했다.
이들 외국기업은 한국정부의 시장개방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이의 시행 프로그램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는 바로 그 약속이행의 잣대다. 특히 아직도 해외에선 한국의 시장개방 의지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행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방한해서 『한국의 5대 재벌개혁이 미흡하다』고 지적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 정부가 약속한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물론 정치권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정부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국내 기간통신사업자들이 너무 헐값에 팔려 나간다든지 손쉽게 경영권을 외국인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든지 하는 통신주권과 관련된 지적이 대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기통신사업법으로 인해 한국정부의 대외신인도가 타격받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여야의 입장차가 좁혀지기 어렵다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면 된다. 약속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회기내 법안을 통과시키고 미흡한 부분은 보완 내지 유예기간을 두라는 것이다.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를 정부 방침대로 처리하되 만약 내년 1월1일부터 시행한다는 조항이 국내 기간통신사업자들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면 시행은 내년 6월부터 한다는 등 시기에 유연성을 두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시기에 대한 신축적 적용은 일각에서 제기되는 「통신주권 지키기」를 위한 시간벌기도 되고 외환위기 고비를 넘긴 상황에서 좀더 좋은 조건의 외자를 유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의미도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법안 상정마저 못한다면 국회가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이 거세질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할 일은 국회는 좀 더 세계적인 사고의 틀을 갖추어야 하고 당사자격인 정통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