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첨단기술업계, 구조조정 "회오리"

 유럽 첨단기술 업계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누적된 경영적자와 세계시장 경쟁 심화, 그리고 새로운 정치현실 도래 등이 이 지역 업체들의 구조조정을 재촉하고 있다.

 지난 4일 독일 지멘스의 하인리히 폰 피에러 최고경영자(CEO)는 뮌헨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총매출액이 7백10억달러인 이 거대기업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1백2억달러의 판매액을 올리며 6만여명을 고용하고 있는 수동부품 부문, 전자관 부문, 전자의료기부품 부문 등 3개 부문을 분리해 일부는 매각하고 일부는 독립회사로 만들겠다는 것과 반도체 부문 분리 공개 추진을 주요 내용으로 발표했다.

 수년간에 걸친 점진적 경쟁력 제고 노력이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 데 대한 반성으로 지멘스가 급기야 근본적 개혁을 단행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지멘스는 앞으로 부품 관련 부문을 정리하고 장비 부문에 집중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부문 분리에 대해 지멘스측은 과도한 투자부담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적자경영이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멘스는 지난 9월말로 끝난 98회계연도에서 전년 대비 10% 증가한 7백8억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했으나 반도체 부문에서 7억달러가 넘는 막대한 적자가 발생해 전체 경상순익은 2% 증가한 16억달러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지멘스만이 아니다. 그동안 경쟁력 저하로 고전해온 유럽의 많은 첨단업체들이 최근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 몇달새 네덜란드 필립스와 프랑스 알카텔 등 유럽의 대표적 기업들이 잇따라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이들이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주주들의 압력도 있지만 최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좌파 정권의 출현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새 정권 출범 이후 새로운 규제가 출현하고 이로 인해 자칫 인력감축에 제동이 걸릴 것을 염려한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필립스는 앞으로 4년 동안 전세계 공장의 3분의 1 가량을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알카텔은 60여개 공장폐쇄와 운송·엔지니어 부문 분리 이후 지난 4일 또다시 통신 부문에 대한 대규모 수술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기업의 구조조정 발표는 곧바로 해당 기업의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공통점을 보였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투자가들이 이들 기업의 기존 조직을 불신해온 것에 대한 증거일 뿐, 이들의 구조조정 노력이 곧바로 시장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는 전문가들이 많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으로 크게 변하는 것이 없고 그 시기가 늦었다는 지적이다.

 창의적 혁신이나 마케팅 능력에 대한 엔지니어링 우위의 사고 또한 유럽 기업이 넘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럽 기업들이 공룡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유럽 기업들은 기존의 비생산적 조직을 잘라내는 노력과 함께 성장시장으로의 진출에도 적극 나서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지멘스·알카텔·필립스 등은 모두 인터넷 기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이동전화 사업에 투자를 하고 실리콘밸리의 기업 사냥에도 나서고 있다. 또 구조조정을 지지할 수 있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지멘스의 경우 울리치 슈마허(40)가 사상 최연소 이사로 선임돼 반도체 부문 분리와 공개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석가들은 여전히 유럽 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독일의 한 분석가는 유럽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대해 『방향은 옳지만 현재의 노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필립스는 지난해야 비로소 루슨트테크놀로지스와 합작해 고속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셀룰러폰 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나 합작사는 제품 판매 주기가 불과 몇개월에 지나지 않는 이 시장에서 새로운 기술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지난 10월 결국 손을 떼는 등 구조조정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유럽 기업의 구조조정 결과는 외형적 목표보다는 얼마만큼 그 목표를 향해 빠르게 전진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오세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