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에 도서실이 있었다. 방은 그렇게 넓지 않았으나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거의 미국과 일본 원서로 채워져 있었으며 더러는 독일어와 불어로 된 서적들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책을 들춰보고 있는데 조금 전에 계단을 내려갔던 홍 박사라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파란 색깔의 표지가 있는 차트를 가슴에 안고 총총걸음으로 들어서더니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차트가 안긴 그녀의 가슴이 유난히 불룩했는데 블라우스 앞단추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당겨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앞가슴의 율동이 느껴졌다.
『인사 나누시오. 홍 박사.』 하고 한성우가 나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애플코리아에 근무하는 컴퓨터 엔지니어입니다.』
애플코리아는 상호를 바꾸었지만 외부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홍 박사는 우리 연구소 연구원이지요.』
『안녕하세요.』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최영준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 여자와 악수를 했다. 그녀는 악수를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힘을 주어 잡는 것은 마치 무엇인가 사인을 보내는 느낌을 주었다. 처음 보는 나에게 사인을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습관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후에 그녀와 친하게 되어서 물어보니까 그것은 습관이면서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특별한 기억을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잊지 않는다고 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좋지만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영어 원서를 살피고 있자 그녀가 나에게 미국 유학을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유학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서 살 돈이 없어서 왔습니다. 빌려가도 되나요?』
쓸데없는 궁색을 떨자 그녀가 웃으면서 안된다고 했다.
『연구소 직원 이외에 외부인한테는 도서가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와서 보시는 것은 무방하지만요.』
내가 한성우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원서를 읽는 것을 보니 영어를 잘 하시는가 본데 내 아이를 좀 가르쳐 주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영어 가정교사를 찾던 참인데.』
원서 살 돈이 없다는 나의 말이 효과를 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