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에 승용차에 나눠 타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는 용희와 함께 타고 가면서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원하지 않았으나 내가 가르쳐야 하는 할당된 두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차 뒷좌석의 소파에 몸을 묻고 가면서 우리는 영어로 회화를 하기로 약속했다. 한국말을 결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아주 쉬운 회화조차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용희는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하니까 자꾸 웃음을 터뜨리면서 장난을 했다.
휴게실에서 잠시 내려 음료수를 마실 때도 영어를 사용했는데 홍 박사가 영어로 거들었다. 딸의 무능을 나무라는 말이었다. 그때 그녀의 발음은 유연했으며 미국에서 6년 동안 있으면서 대학을 다닌 세련된 회화였다. 낱말을 틀리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영어 발음은 엉터리였다. 홍 박사가 엉터리 발음을 꼬집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멸시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느낀 바가 있어 영어 회화 카세트를 사놓고 열심히 들었다. 미국인이 직접 회화하는 목소리를 들었고 미국영화 상영관에 들어가 발음의 정확성을 귀에 익혀갔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성과를 거뒀는지는 모르지만 훗날 미국에서 활동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리는 호텔에서 벌인 용희 할아버지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용희의 부친 김 회장을 만났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 했지만 전혀 염색을 하지 않은 그대로였고 사진에서 본 것보다 더 젊은 인상을 주었다. 눈에는 활기가 차 있고 목소리는 강하고 힘이 있었다. 섬유재벌답게 힘이 느껴지는 노신사였다. 그때 그의 큰아들도 만났다. 용희 위로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맡아 하고 있었다. 그는 계모보다 나이가 한 살 위인 서른다섯살이었다. 작은아들은 미국에서 무역회사 일을 하고 있었다. 뉴욕 증권가에서 활동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왔다.
그날의 주인공인 팔순의 노인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아직 정정했다. 외모는 김 회장과 붕어빵처럼 닮은 꼴이었다. 그는 일제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방직공장의 간부였다고 했다. 아들인 김 회장도 방직공장에 다녔다. 해방이 된 후에 부자는 그 방직공장을 인수해 경영했다. 그러나 오늘의 부를 창출한 것은 지금의 김 회장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6·25 전쟁 때 국방부로부터 군복 하청을 받아 찍어내는 바람에 갑자기 성장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십여개의 방계 회사를 거느린 재벌로 부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