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에 있는 한성우를 만났더니 다른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극구 사양했다. 돼지고기를 먹고 심하게 체한 사람은 돼지고기만 봐도 체한 기분이 들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가정교사 일을 하다가 겪었던 일은 가정교사 말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다시 그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하숙을 했던 피아노 치는 음대생이 있었던 집이 아니었다.
이제 겨울 날씨가 되면서 쌀쌀한 바람이 분다. 옷이 없어 어머니에게 전에 입던 내복을 부치라고 했다. 새로 사 입을 수도 있지만 돈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체격이 별로 변하지 않았으니 전에 입던 것을 그대로 입으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모처럼 아들을 보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짐이 많다고 하면서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터미널로 나오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나는 이길주 차장에게 말하고 허락을 얻었다. 오후 3시쯤에 어머니가 도착하기 때문에 하숙집에 모셔다 드리고 다시 회사로 나온다고 했지만 이길주 차장은 그대로 퇴근해도 좋다고 했다. 그는 처음보다 나에 대한 감정이 좋아지고 있었다. 기술실에서 궂은 일은 내가 도맡아 하고 있으니까 나를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궂은 일 뿐만이 아니라 기술을 요구하는 전문적인 일도 이제 잘 안되면 나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다.
컴퓨터와 관련해 이론적인 견해나 기술적인 능률에 있어서 다른 선배 엔지니어들보다 내가 우수했다면 그것은 수시로 읽은 미국 컴퓨터 서적 때문이었다. 나는 외국어 전문서점에 의뢰해 컴퓨터에 관련된 신간은 모두 구해달라고 했다. 컴퓨터는 미국에서 개발되었고 계속 미국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에서 발행되는 전문서적들은 시시각각 그 첨단기술을 발표하고 있었다. 4년 동안 대학에서 전자공학 이론을 배웠거나 전문학교에서 컴퓨터를 공부했다고 해도 원론적인 것을 터득했을 뿐이지 시시각각 발전하는 기술이론을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원서 읽기를 귀찮아 했고 제대로 해독하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그들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전문서적을 독파하는 나에게는 단순하고 논리적인 것도 선배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는 무엇을 그렇게 많이 싸왔는지 양손에 들고도 버스 짐칸에 커다란 가방을 넣고 서울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