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기업분할 단행 의미

 미국 휴렛패커드(HP)가 컴퓨팅 및 이미징과 계측기라는 2개의 독립법인으로 회사를 분할하는 기업재편을 전격 단행한다.

 60년의 HP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조치로 평가되고 있는 이번 기업재편은 향후 정보기술(IT)시장 구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지난 92년부터 HP를 맡아 회장과 사장, 최고경영자(CEO)를 겸임하고 있는 루 플랫의 퇴진도 HP 행보에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됨직하다.

 이번 HP의 기업분할은 사실상 그룹에서 계측기사업본부를 분사시키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사업을 떼어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크게 연관이 없었던 컴퓨터 및 관련사업과 계측기사업을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다. 수익성이나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사업부서를 혹 떼어내듯 분리시키는 일반적인 분사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HP의 설명이다.

 루 플랫 회장과 새로운 계측기회사의 CEO로 내정된 에드워드(네드) 반홀트가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시종 강조한 것도 「기업의 민첩성」이었다. 그동안 관련이 없는 분야끼리도 일일이 의사결정과정을 거쳐야 했던 비효율적인 경영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편해 탄력있게 운영함으로써 급변하는 시장환경에 신속하게 대처하겠다는 얘기다.

 사실 「민첩함」이나 「신속함」 등은 HP의 경영조직이 가지고 있던 최대의 취약점이었다.

 플랫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들은 너무나 신중한 나머지 과감한 의사결정에는 항상 느리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래서 시장변화에 대한 대처도 언제나 한발 늦었다. 마케팅과 홍보작업도 썩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HP는 엄청난 힘과 마케팅 포지션 및 브랜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장점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회사 내외의 비판이다.

 심지어 시장조사업체의 한 분석가는 『오늘날 대형 IT업체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그런데 루는 이에 걸맞지 않다』고 일침을 놓는다. 한마디로 「속도」는 HP의 특징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번 조치에는 이같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는 데 분석가들은 의견을 같이 한다.

 기업분할과 관련해 HP는 당초 프린터와 이미징사업부도 분리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백지화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외형적인 덩치보다는 효율적인 경영구조와 신속한 의사결정체제에 기업재편의 상당한 비중을 두었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각각 독립적인 기업으로 나눠짐으로써 컴퓨팅 및 이미지사업본부와 계측기사업본부는 이제 경영조직은 물론 그동안 통합적으로 운영돼 왔던 연구개발조직도 별도로 운영된다.

 이번에 분할되는 한 축인 계측기사업은 사실 HP의 탄생을 있게 해 준 장본인.

 지난 39년 실리콘밸리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 HP의 역사는 계측기와 함께 한다. 그리고 아직도 HP는 세계 계측기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HP의 이 부문 매출은 76억달러로 총 4백70억달러의 전체 매출 중 16% 정도를 차지했다.

 새로 탄생하는 계측기회사는 앞으로 인터넷기능의 계측장비와 생명공학에 초점을 맞춘 의료기기사업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조직면에서도 보다 신속하고 민첩하며 활력에 찬 기업문화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HP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될 컴퓨팅 및 이미징회사는 컴퓨터·소프트웨어·주변기기·서비스·이미지솔루션 등을 망라하면서 전자상거래를 비롯, 인터넷에 기반한 다양한 서비스 제공에 주력할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 플랫 회장은 당분간 최고경영직을 유지하며 기업재편작업을 총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2∼16개월 걸릴 예정인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이미 특별팀을 통해 후임 CEO 물색작업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58회 생일을 맞이하는 플랫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제 후계구도를 생각할 때라며 자신의 퇴진과 기업재편작업을 묶어 동시에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플랫 회장은 지난 92년부터 HP를 이끌어 오면서 IT시장에서 HP의 위상을 굳건히 세워 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추진력 감퇴와 96년 회사창립자이자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데이비드 패커드 사망후 이사회의 공백은 곧바로 경영진을 무기력상태로 만들면서 성장률 둔화로 이어지게 했다는 지적을 면치 못했다.

 이에 따라 플랫 회장은 기업재편과 함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용퇴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IT업계의 모험사례가 될 HP의 기업분할작업이 과연 성공적으로 마무리될지, 그리고 플랫 회장의 후계자는 어떤 색깔로 그룹을 이끌어 나갈지에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구현지기자 hjk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