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정보기술(IT)업체인 IBM의 사업행보에 최근 들어 두가지 중대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하나는 지난 한달새 델컴퓨터 및 EMC와 맺은 매머드급 부품공급 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PC부문의 급격한 위축이다.
IBM은 이달초 델과 160억달러에 달하는 컴퓨터 부품공급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지난 24일 EMC와 30억달러의 디스크드라이브 공급계약 및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들 업체는 모두 컴퓨터와 스토리지분야에서 IBM의 최대 라이벌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IBM은 연례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PC사업이 9억9200만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PC부문의 이같은 손실액은 전년의 5배가 넘는 금액으로 IBM으로서는 여간 타격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두 사실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IBM이 최대 컴퓨터업체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가 됐던 PC가 서서히 무대 전면에서 물러나고 프로세서를 비롯해 디스크드라이브, 액정디스플레이(LCD) 등 그동안 상당한 기술력과 생산력을 키워왔던 핵심부품이 새로운 수입원으로 자리잡으면서 IBM 사업구도가 급속히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받아들여진다.
즉 다음 세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PC 대신 이들 부품의 OEM 공급을 서비스·소프트웨어 등과 함께 새로운 전략사업으로 삼는 한편 세계 최대 부품업체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정립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구리칩을 비롯해 마이크로프로세서(파워PC), 주문형 반도체 등 최신 칩기술과 조립설비를 갖추고 있는 IBM의 부품사업본부는 휴대전화에서부터 위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채용되는 칩을 공급, 그룹내에서 OEM사업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조직으로 꼽힌다.
이번에 기술제휴를 체결한 델과 EMC도 앞으로 IBM의 반도체칩을 조달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며 이외에 최근 일본 휴대전화시장에서 퍼스널 디지털 셀룰러 표준용 칩을 발표한 DSP커뮤니케이션스가 이 칩에 IBM의 첨단 실리콘 게르마늄(SiGe)기술을 채용할 예정이고 휴즈와 노텔·해리스세미컨덕터 등도 네트워크 및 위성장비에 IBM SiGe부품을 탑재하고 있다.
이달초 델이 IBM과 제휴를 맺은 것도 구리칩이나 IO칩, 시스템온칩 등 이 업체가 보유하고 있는 첨단 칩기술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IBM의 부품 OEM사업은 최근 신설된 테크놀로지그룹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중점사업의 하나로, 93년 이후 줄곧 연평균 40%의 고성장률을 기록하며 지난해 66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300억달러 규모의 서비스부문이나 하드웨어그룹에 비해서는 아직 미약한 비중이지만 성장성이란 측면에서 PC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IBM의 판단이다.
한편 10억달러라는 PC부문의 손실은 이제 더이상 PC가 돈벌이사업이 될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이미 예견된 사실이기도 하다.
마진율을 제물로 한 PC시장의 끝없는 가격경쟁은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IBM의 루 거스너 회장은 지난해 가을부터 『PC시대는 끝났다』며 「PC 사망」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PC부문의 손실을 미리 예상한 발언인지 모르지만 만신창이가 된 PC사업을 치료하기보다는 안락사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이번 연례보고서와 함께 발표한 그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PC사업의 무게를 덜겠다는 방침은 강조됐다.
물론 거스너 회장의 발언은 PC가 완전히 사라진다거나 IBM이 PC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장 원동력으로서 PC의 역할은 끝났으며 더이상 PC 자체가 고객들의 구매목적이나 애플리케이션 개발의 기본 플랫폼이 되는 때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자리는 이제 네트워크가 대체해 가고 있다.
고객들의 PC 구매목적이 대부분 온라인 이용에 있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예다.
때문에 IBM으로서 PC가 더이상 수익의 주요원천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은 첨단 기술력과 생산력을 이용한 부품 OEM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구현지기자 hjk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