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사흘간의 휴가가 나왔다. 나는 목포로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다른 지방의 공사 현장에 나가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 현장을 찾아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나에게 가슴 깊게 박힌 응어리가 된 듯했다. 그렇다고 영원히 원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증오도 삭아버렸지만, 오랜 세월 아버지의 느낌은 최악의 상태였고 속절없이 불행했다. 어머니는 내가 낯선 외국으로 나간다고 매우 섭섭해 했다. 그러나 유학이라는 사실이 위안을 줬다. 군대에서도 유학을 보내는 일이 있느냐고 반신반의했지만, 엄연한 사실이니만큼 그렇게 불안해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동안에 푼푼이 모은 돈을 나에게 줬지만 받지 않았다. 군부대에서 충분한 자금을 대줬고, 미국에 가면 CIA에서 모든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떠나는 날 아침에 나는 모든 직속 상관들에게 출국신고를 했다. 직속 상관인 소대장 송재섭은 내가 대견한지 자주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축하해. 혜련이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쓰지 마레이. 내가 있잖노.』
그는 누이동생 송혜련과 내가 무척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사령관을 접견했다. 그는 나의 경례를 받고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컴퓨터카면 미국이제? 거 가서 더 배워와라. CIA에서 네가 개발한 거 빼갈러꼬 하는 모양인데 그 도둑놈들한테 몽땅 주면 안된다. 무슨 말인지 알제?』
『네, 사령관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사령관이 무척 고마웠다. 물론, CIA의 압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상치도 못했던 유학길에 올랐던 것은 그의 결정이 컸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간 이후 세상이 바뀌면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얼마 있으니까 그가 부상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교포사회에서는 그를 죽일 놈으로 치부하고 있었고, 나 역시 좋지 않은 감정이었다. 외국에서 좀더 객관적으로 듣게 된 많은 사실들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특히 나는 CIA 사람들과 자주 만나면서 고국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들었다. 그들 역시 침묵하거나 동조한 것이기는 했지만, 객관성은 있어서 정확한 정보보고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