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증명해 보였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나의 결벽에서 오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녁 식사를 막 마친 다음인데 교회에서 만난 여학생 마리아 송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 성이 같군요. 그녀는 시카고 주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재원인데, 교민 2세입니다. 연구소가 있는 애버뉴에 와서 전화를 했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어 기숙사에 들어오게 했지만 좀처럼 돌아가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습니다. 이들은 이성간이라고 해도 상대방에게 호감이 가면 저돌적입니다. 그 여자를 돌려보내고 나서 당신이 더 그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랍니다. 당신은 나에게 있어 도덕성에 대한 심판관이며, 지도자입니다.
1월 2일
미시간호변에서 최영준으로부터
예쁜 여자가 있으면 신경쓰지 말고 사귀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 대한 투정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말은 한국에서 사귄다는 말과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차이가 없을 수도 있어요. 이성의 친구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도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연구소에 일본에서 온 남자 학생이 한 명 있는데 그는 일본에 애인이 있다고 하면서 그녀의 사진을 품속에 넣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이곳의 백인 여자들과 사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하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고국에 애인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여기 여자들과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고국에 있는 미요코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엘리자베스는 그냥 친구이고, 외로움을 나누는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알 듯하면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되면 고국에 있는 애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정서적인 혼란이 와서 못할 것이라고 했더니,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자기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듣기에 따라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그는 그렇게 해도 되고, 사랑과 육체의 유희를 별개로 나눌 수 없는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가치관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있고 없고는 개인적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