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용컴퓨터(PC)의 메모리는 컴퓨터의 두뇌인 CPU(Central Processing Unit)가 사용하는 운동장과도 같다. 메모리가 PC에서 CPU와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복잡한 프로그램을 처리하기 위해선 PC 메모리의 고속화·대용량화가 필수적이다. PC의 성능은 곧 메모리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미국의 주요 업체인 인텔이 주기판의 메인 메모리를 램버스 D램으로 채택하려 했던 입장에서 후퇴해 싱크로너스 D램을 채택하는 PC133 규격도 승인키로 함으로써 전세계 PC 및 관련업체에 파문이 일고 있다.
한국의 LG반도체를 비롯한 삼성전자·현대전자 등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램버스 D램이 앞으로 인텔의 차세대 주기판 메인 메모리로 채택될 것으로 보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이들은 이미 램버스 D램 생산채비를 갖추고 인텔이 주기판에 채택하기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대만 반도체 업체들보다 앞선 한국의 램버스 D램에 대한 투자는 시의적절해 보였으며 인텔이 램버스 D램을 적기에 주기판에 채택하기로 함으로써 한국 업체들은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인텔이 램버스 D램 채택 시기를 3·4분기 이후로 연기한 데 이어 이번에 램버스 D램의 경쟁 제품인 PC133 규격에 맞는 싱크로너스 D램을 지원하는 칩세트를 지원할 수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국면은 완전히 전환됐다.
우리 업체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은 아니라 하더라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우리 업체들이 이같은 사태에 처한 것은 인텔만의 잘못으로 보기는 어렵다. 인텔은 이미 램버스 D램의 규격이 다른 D램보다 까다로우나 고속 처리가 용이하기 때문에 칩세트의 메인 메모리에 채택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인텔은 또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이나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을 대상으로 적지 않은 자금을 지원, 램버스 D램 생산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같은 제의를 미국과 한국 업체들은 받아들인 상태였으며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 문제였다. 저간의 경과를 보면 인텔이 램버스 D램을 차세대 주력 메모리로 이끌고 가려고 최선을 다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상황은 이처럼 변했고 우리는 램버스 D램에만 거의 전적으로 매달려 낭패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는 이같은 가능성에 대해서 사전에 대비를 했어야 했다.
우리 반도체 업체들은 인텔이 램버스 D램을 차세대 메인 메모리로 채택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의심해본 적이 없는 반면 일본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인텔의 제의를 거절, 다양한 메모리를 생산하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이어 최근 세계 유수의 PC업체인 IBM이 램버스 D램을 포기하고 PC133 규격을 지원한다는 정책을 천명하면서 차세대 PC주기판의 메인 메모리는 램버스 D램보다는 PC133이나 233 규격의 싱크로너스 D램이 유력해지는 구도로 변해버렸다. 이같은 결과로 메모리 업체들에 보조를 맞췄던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나 PCB 업체들도 마찬가지로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어쩌면 일본이 인텔로부터 램버스 D램을 생산하는 데 대한 지원을 받는 것을 거부한 것도 인텔의 예속을 피하기 위한 통찰력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모든 메모리 업체들이 램버스 D램을 생산할 경우 인텔의 예속이 더 강화되고 불안정한 메모리 가격으로 이익이 날 게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 업체들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입증됐다.
통찰력 부족으로 인한 경영자의 판단 잘못으로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를 상황에 처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그 생산시기가 다른 업체들보다 앞서면 그만큼 수익도 높다. 이번에 인텔이 램버스 D램을 주기판으로 채택하는 것을 연기하고 또 PC133도 포용하기로 함으로써 우리 반도체 업체들은 「시기의 이익」을 놓쳐버린 것이다. 우리 메모리 업체들은 뒤늦게 다양한 메모리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번 사태는 경쟁사회에서 경영자의 상황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