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서 제대한 후에 내가 제일 먼저 개발하려고 한 것은 즉각 상품이 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였다. 좀더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평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통신과 기계 제어장치였지만, 회사에서 원하는 상품으로는 워드프로세서가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독립적인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명필」보다 그 이후 개발된 「하나」였다. 워드프로세서 「하나」는 금성소프트웨어(후에 LG소프트)가 개발한 것으로 행정전산망 PC용으로 내놓아 인기를 얻었다.
그 전에 KAIST 전산개발센터 제1그룹에서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정부의 예산지원과 산업체(고려시스템산업)의 후원으로 개발된 이 워드프로세서는 고려시스템산업에서 맡아 제품을 양산했다. 1983년 여름 인천시 작전동에 있는 한화그룹 부평 제2공장에 워드프로세서 「명필」 생산공장이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개발한 「워드80」은 자일로그의 8비트 Z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한 컴퓨터에 한글이 지원되는 CRT 터미널과 라인 프린터를 연결해서 만든 한글 워드프로세서다. 80년 가을에 발표된 「워드80」은 시스템 구성방식이 어렵고 가격이 너무 비쌌다. 「워드80」 워드프로세서를 하나 사려면 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에 KAIST에서 민간 지원금을 끌어들여 이것을 개량한 「워드88」을 만들었으나, 「워드80」의 기능에서 크게 향상되지 못했고, 가격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으나 비싼 것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한글, 한자, 영문을 호환하는 기능을 하지 못했다.
기술실의 책임자 노 과장을 통해서 사장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노 과장은 나보고 직접 사장을 만나 설명을 해보라고 하였다. 이미 연구개발을 거부한 사장을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아주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워드프로세서 개발뿐만 아니라 기술자들을 판매 일선에 내보내는 회사의 방침에 크게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을 단독 면담할 생각을 했다. 사장 면담을 요청하자 며칠이 지난 아침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홍 사장이 기술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워드프로세서 프로젝트를 도표로 만들어 가지고 들어갔다. 그것을 탁자 위에 펴놓고 설명을 할 작정이었다.
『자네가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나에게 할 말이 있는가?』
홍 사장은 안경다리를 만지고 몸을 등받이에 기대면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