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하이테크업계, 미국투자 "뭉칫돈"

 일본 하이테크업체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지역 벤처투자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급변하는 기술 흐름을 따라잡고 시장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의 본고장인 실리콘밸리에 직접 뛰어들어 이곳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과 긴밀한 관계를 다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업체가 마쓰시타전기. 북미지역에선 파나소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쓰시타전기 미국법인은 지난해 10월 실리콘밸리 중심가 근처에 창업보육센터인 「파나소닉 디지털 콘셉츠 센터」를 설립하는 한편 투자법인인 「파나소닉 벤처스」를 출범시켰다.

 파나소닉 벤처스의 초기 자본금은 벤처캐피털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5000만달러. 차세대 컴퓨팅이나 홈네트워킹, 인터넷기기, 전자상거래 등의 유망 기술 및 서비스 개발과 육성이 이 회사의 설립목적이다.

 파나소닉 벤처스가 입주해 있는 디지털 콘셉츠 센터는 연면적 2만평방피트 규모로 이달말까지 20여개의 벤처기업을 수용할 예정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네트워크 구축에서부터 법률, 회계자문 등의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된다.

 이와 별도로 파나소닉 벤처스는 올해 안에 2∼4개 업체를 선정, 직접투자를 단행할 계획으로 자금지원은 물론 연구개발 관련정보 등을 공유할 방침이다.

 이미 지난 3월 홈네트워킹 기술업체인 에피그램에 투자했는데 후에 이 업체가 브로드컴에 인수되자 이 과정에서 파나소닉은 상당한 이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마쓰시타가 노리는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탄탄한 기술력을 갖춘 벤처기업들에 투자함으로써 이들이 거두는 성공의 결실을 함께 맛보는 것이다.

 마쓰시타의 실리콘밸리지역 벤처투자는 일본업체로선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미국업체들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의 한 반증인 것이다.

 미국 벤처전문 시장조사업체인 벤처원에 의하면 일본의 대표적 하이테크기업인 일본NEC가 지난 92년에서 98년까지 자본투자한 업체는 노트북PC 분야의 바뎀을 포함, 5개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적극적이라고 하는 도시바도 지난 4년 동안 미국기업에 대한 투자가 양방향TV 서비스업체 윙크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6개 업체에 총 10여건이 고작이었다.

 미국 하이테크업계를 대표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인텔의 인수합병 및 지분매입 등 투자건수가 올 들어서만 각각 20건과 15건 정도에 이르고 있는 점과 비교할 때 상당히 대조적이다.

 물론 이들 업체의 본부가 일본이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벤처투자 활동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계 하이테크 시장구도가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를 주도하는 실리콘밸리지역의 인적자본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일본업체들에는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이다.

 여기에 지난 회계연도에 엄청난 적자와 성장률 감소를 맛봐야 했던 일본업체들로서는 급변하는 시장질서에 맞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했다.

 특히 인터넷을 기반으로 컴퓨터와 통신, 가전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추세는 그들에게 일종의 도전이자 기회로 작용했다. 때문에 일본업체들은 이같은 통합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유망 기술업체들에 그 어느 때보다 주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쓰시타 외에 미쓰비시, 소니, 도시바, NEC 등 내로라하는 일본 대기업들이 최근 들어 벤처기업 및 유망 기술업체와의 기술·자본제휴에 적극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번 IBM과 온라인 음악전송기술 개발 합의를 필두로 미국업체들과의 기술제휴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소니는 그 뒤 케이블TV 세트톱 박스용 웹브라우저 기술에서 스파이글라스와 하드디스크드라이브 분야에서 퀀텀 및 시게이트 테크놀로지와 각각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최근 실리콘밸리 벤처기업들이 엔터프라이즈 애플리케이션 개발 위주에서 벗어나 소비자시장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전통적으로 가전분야의 강자인 일본업체들이 이 지역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본 하이테크업체들의 미국투자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본사가 일본에 있기 때문에 미국 현지의 벤처투자에 관한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실리콘밸리의 투자환경과 전망을 일본에 있는 최고경영자에게 설명하고 이에 따른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국기업들처럼 독자적이고 직접적인 투자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신속하고 독자적인 투자결정을 내리기 위해 설립한 마쓰시타의 파나소닉 벤처스는 다른 일본업체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구현지기자 hjk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