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업계가 다음달 1일부터 실시되는 오픈프라이스(자유가격)제와 관련,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유통질서의 일대변혁이 예고되기 때문일 것이다.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업자가 판매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해 표시하는 오픈프라이스제도가 도입되면 그동안 제조업체 중심으로 운영되던 「유통」이 문자 그대로 유통업체 중심으로 넘어가게 되고, 소비자들의 구매의욕을 부추기기 위해 제조업체들이 실시해 왔던 각종 형태의 할인 판촉활동도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등 유통질서의 일대변혁이 불가피해진다.
하지만 이에 대응할 만한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개발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가전업계가 과연 어떤 대응책을 마련할지가 당장 최대의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
오픈프라이스제가 실시되면 유통업자들은 제조업체에서 공급받은 가격을 기준으로 관리비와 마진 등을 포함한 뒤 주변 경쟁점포에 대한 경쟁력까지 감안해 최종 판매가격을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권장소비자가격을 기준으로 할인판매하던 기존의 가격체계와 달리 가격편차가 심해지고 같은 가전사 전속 대리점이라 하더라도 가격차이가 발생한다.
정부가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서 새로운 유통질서로 이미 정착된 오픈프라이스제도를 뒤늦게 도입하는 것도 결국 제조업체의 시장가격 통제에 의한 불공정 거래행위, 즉 가격담합 및 재판매가 유지 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소비자의 구매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여러 유통점의 서로 다른 가격정보를 입수해 좀더 저렴하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오픈프라이스제도의 도입으로 제조업체들은 제품에 가격과 관련된 어떠한 표시도 할 수 없으며 일반광고물에 제품의 기능과 특장점만 내세울 수 있을 뿐 가격을 표시할 수 없다.
또 제조업체가 정한 가격이 없기 때문에 가격을 할인해 판매하는 할인행사는 당연히 규제된다.
가전업계가 이번에 오픈프라이스제도가 적용되는 컬러TV를 비롯해 VCR·오디오·세탁기·유선전화기 등 5개 제품에 대한 대리점들의 행동지침을 시달하는가 하면 대응방안을 마련, 시행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LG전자는 최근 실판매가격 표시가 의무화되는 5개 품목에 대해 판매가격 결정법과 가격표시방법 등을 담은 안내서를 제작·배포하는 한편 차별화된 고객관리와 고객 및 상권 특성에 맞는 판촉활동 등 비가격적인 경쟁력을 배양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픈프라이스제 시행에 따른 현장 가이드를 마련해 해당제품의 할인판촉을 중단하고 각 영업지점내 대리점간 가격경쟁을 자제하도록 하는 등 대리점 교육과 가격표 교체 지원작업에 착수했다.
만일 권장 소비자가격 표시가 금지되는 품목의 실제 판매가격과 표시가격이 다를 경우 제조업체는 물론 해당 유통점에 1차 적발시 시정조치, 2차 300만원, 3차 500만원, 4차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는 등의 제재가 가해짐은 물론이다.
오픈프라이스제도의 도입은 소비자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사회가 발전함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전업계에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는 데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제조업체와 대리점이라는 종속관계로 형성돼 온 국내 가전제품의 유통체제가 오픈프라이스제도의 도입으로 역전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가전제품 관련 유통산업은 선진국과 달리 철저히 제조업체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미 유통시장이 완전개방돼 대규모 자본을 앞세운 외국 대형 유통업체들이 대거 내수시장에 들어오고 국내 자본에 의해 속속 대형 유통점들이 들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가격결정권이 유통업체에 넘어간다는 것은 곧바로 국내 가전시장에도 유통업체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들어섬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내 가전업체들은 과거와 같은 가격을 이용한 마케팅에서 탈피, 기능이나 디자인 등 비가격적인 요소를 차별화해 자사 제품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새로운 유통질서에 대한 가전업계의 적극적인 대응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