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반도체 호황 "빛과 그늘"

 64MD램 현물시장 가격이 한달여 만에 무려 5배 이상 폭등하면서 국내 반도체3사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국내 반도체산업 사상 최고의 해였던 95년에 버금가는 수익을 올릴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3사 임직원들은 늘어나는 매출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패밀리」로 분류되는 국내 반도체장비 및 재료업계의 표정은 소자업체들과는 딴판이다. 의외로 IMF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던 지난해보다 더 우울한 표정이다. 이들이 우울한 이유는 지난해 서민사회의 유행어였던 「고통전담의 원칙」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경제가 최악이던 시절, 영원한 「을」의 입장인 장비·재료업체는 「갑」인 소자업체들로부터 현실적으로 감내하기 힘든 「요구」를 받아왔다.

 이른바 반도체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고통의 일부를 떠맡아달라는 「고통분담」의 요구다.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납품가격의 대폭적인 인하. 이에 따라 「을」의 대부분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30∼50%에 이르는 대대적인 바겐세일을 실시했다.

 하지만 고통분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의 인력감축으로 생겨난 명퇴인력의 상당부분을 임원으로 모셔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IMF의 단초」로 불리는 모 소자업체의 자동차산업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동차 몇대 정도를 책임져주는 것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난 현재, 이러한 고통분담의 원칙은 돌연 「기쁨 독점의 법칙」으로 돌변해버렸다. 반도체 가격폭등으로 발생하는 모든 수입은 「갑」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을」의 고통분담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장비·재료업체들의 공급가격 정상화 목소리는 그저 허공을 가르고 있을 뿐이다. 반도체산업이 또 한번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건전하고 상호 보완적인 갑과 을의 협력에서 비롯됐다는 진리를 모르는 반도체 관계자들은 없다. 어려움뿐만 아니라 즐거움까지 나눌 수 있는 갑의 어른스러움이 아쉽다.

최승철기자 sc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