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디지털시대에 걸맞는 호칭을

 인터넷 이용자가 400만명을 넘었다는 얘기를 들은 지 몇달 안된 것 같은데 이미 580만명이라고 한다. 가위 놀라운 증가속도다. 이런 추세라면 전국민의 25%, 즉 1000만 인터넷 이용자 시대도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내년중에 맞게 될 것 같다.

 이제 네트워크 사회가 빠른 속도로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해준다. 이처럼 급속히 도래하는 네트워크 사회를 맞으면서도 아직 우리에게는 수직적 계층사회의 틀과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 하나 있다.

 바로 호칭에 관한 문제다. 우리처럼 복잡다단한 호칭체계를 가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대리부터 시작해 회장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직급에 따른 호칭만 해도 10여가지나 된다.

 게다가 「대우·부·보·수석」 등 여러 변형된 호칭까지 합치면 가장 대표적인 계급사회라는 군의 호칭체계가 무색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막상 가장 많은 수의 평직원에게는 적절한 호칭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버젓한 직급호칭 하나가 그 사람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의 위상과 비중을 가늠케 하는 척도로 작용해 왔다. 그러다 보니 직급호칭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생활에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되었다.

 우리처럼 복잡한 직급호칭을 가진 일본만 해도 성 또는 이름 뒤에 「상」이라고 부름으로써 조직에서의 직급과 개인의 호칭을 별개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아직도 조직에서의 위치가 개인생활로 직결되고 있다. 한 직급 승진하면 모든 지인들에게 알려야 되고 거꾸로 남의 직급 승진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전 호칭을 부르게 되면 본의 아니게 결례가 된다.

 전세계 30만명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수시로 대화가 가능한 글로벌 협업체제를 가진 IBM에서조차 한국사람들은 호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세계에서 모두 상대방을 이름으로 부르는데 유독 한국사람들은 특히 윗사람을 부를 때 이름 대신 직급호칭을 쓰는 경향이 있다. 상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왠지 무례한 듯 느껴져 영문에서까지도 성 뒤에 직급호칭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호칭문제는 우리의 의식구조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기업에서 이 직급 호칭체계는 임금체계 못지 않게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부담이 되고 있다. 승진의 기회가 적체된 기업에서는 호칭을 상향 조정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반에 걸쳐 호칭 거품현상이 팽배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모르는 남자는 무조건 「사장님」으로, 여자는 「사모님」으로 불리는 희한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수직적·폐쇄적·관료주의적인 환경에서 살 때는 기업활동이나 공적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복잡한 직급호칭이 나름대로 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디지털 세상의 문턱을 이미 넘어섰다. 이제는 편지나 전화보다도 전자우편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더 편하고 쉽게 되었다. 개방된 환경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원하면 아무라도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곧 다가올 1000만 네티즌 시대에는 개인의 직급호칭이 지켜질 수 없다. 현행의 수직적 직급호칭 체제로는 직급과 서열이 파괴되는 전문가 시대나 글로벌 협업시대를 효과적으로 맞이하기 어렵다.

 네트워크 사회의 특성은 개방성·즉시성·평등성에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한 직급호칭의 부담을 벗고 서로를 쉽게 부를 수 있는 공평하고 호감가는 새로운 호칭을 쓰자.

 서로에게 간단히 이름 뒤에 「씨」나 「님」자만 붙여 쓰면 어떨까. 손아랫사람의 경우에는 「씨」로, 손윗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님」자를 붙이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지 모르지만 쓰다보면 곧 익숙해지지 않겠는가. 디지털 사회에 걸맞은 호칭을 생각하다 보니 아호를 생활화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새롭게 느껴진다.

신재철 한국IBM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