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우리가 기술만 제공했지만, 고려방적은 칩을 만들어줬잖아. 설비가 빈약해서 제품이 모두 불량한 거야.』
『제품이 불량하다니? 그래서 형 보고 불량품은 납품하지 말라고 했잖아.』
『불량품을 가리는 기준은 애매해. 엄격하게 검증하면 하루 100개 생산하는 제품 가운데 20∼30개를 불량품으로 분류해야 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생산가는 떨어지고, 제대로 납품을 할 수 없어. 그래서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합격을 시켰더니 그것들이 모두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
『형, 정말 왜 그랬어? 20∼30개가 아니라 100개가 불량해도 납품을 하지 말아야지. 이 일은 신용이 재산인데,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그는 나의 학교 선배이면서, 처음 컴퓨터업계에 발을 딛게 한 은인이었다. 그를 부하직원 다루듯이 윽박지를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낭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고려방적은 그의 전담이기 때문에 그는 그곳의 기술간부들과 개인적인 친목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타협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 나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고려방적은 현재 장착한 칩을 모두 제거해 가라는 거야. 그리고 새로운 것을 달아달라는 거야.』
『불량품만 수거하면 되지 왜 전부를 바꾸라는 거지?』
『다른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
『형이 대구로 내려가서 어떻게 해봐. 그걸 다 바꾼다면 시간이 걸리고,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아. 그리고 문제는 그동안에 냈던 돈을 결제하지 않겠다고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렇게 되면 심각한 사태가 발생해.
그곳에서 준 어음은 모두 돌렸는데, 결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그걸 우리가 다시 처리해야 하는데 지금 그렇지 않아도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데….』
나는 울음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배용정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벌판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다.
창밖 비스듬히 보이는 길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버스는 느티나무 가로수 사이로 해서 저 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