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벤처기업 (298)

 1986년 여름에 나는 모스크바로 갔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남달리 뛰어난 것이 큰 도움이 되어 나는 2개월 만에 최소한의 러시아어를 습득했다. 물론 그 습득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었고, 그 원리를 이해한다기보다 필요한 단어를 암기하는 수준이었다. 모스크바에 있으면서 열심히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그것은 러시아 과학원서를 읽기 위해서였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컴퓨터산업은 뒤떨어져 있었지만, 우주공학을 비롯한 통신 관련 기술은 높은 수준에 있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갔을 당시 소련은 고르바초프시대에 접어들면서 개방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이 발아를 할 무렵이기 때문이었다. 82년 11월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KGB의장이었던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가 집권 15개월 만에 죽자 뒤를 이어 체르넨코가 서기장이 되었다. 체르넨코는 브레즈네프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 13개월 만에 사망하자, 85년 3월에 53세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되었다. 늙은이들이 서기장이 되면서 자꾸 죽자 이번에는 젊은 서기장을 선출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이 되면서 그의 혁신적인 정책으로 해서 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소련에 갔을 당시만 해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지 1년이 지나는 무렵이어서 개방의 물결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지내놓고 보니 그때 이미 점차 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당시 소련사회는 개혁의 필요성보다 개혁에 저항하는 힘이 더욱 컸다. 소련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공산주의체제의 건설과 유지에 열을 올렸을 뿐, 발전적인 개혁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는데, 두드러진 것은 30년대 스탈린에 의한 혁명적 재편 이후 아무런 사회적인 변화가 없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 흐루시초프가 반스탈린적인 악폐를 소멸시키려고 했지만, 그것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권력 기반을 위한 것이지, 대국민적인 개혁이 아니었고 경제개혁이 성공하지도 못했다.

 제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에 형성된 첨예한 냉전이 양국의 무기 양산, 특히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했고 첩보경쟁을 불러일으켰다. 우주 경쟁을 비롯해서 모든 분야에 경쟁을 가져왔지만, 이 첩보 경쟁은 첨예하게 대립되었으며, 고르바초프시대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냉전이 소멸되었지만, 오랜 세월 해왔던 짓거리는 멈추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내가 그 속에 뛰어들어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