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대하는 그 백야는 그 자체가 나의 마음을 묘하게 설레게 하고 있었다. 나는 문뜩 모스크바에 와서 보았던 백야라는 영화를 연상했다. 그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한 여자가 군대에 간 애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애인은 좀체 돌아오지 않는다. 외로웠던 여자는 가까이 나타난 어느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그 남자와 사랑을 속삭이면서 하얗게 눈이 덮인 백야의 들판을 걷는다. 그런데 그 벌판 저편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실제 애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그 여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포옹을 하고 키스까지 하였던 그 남자를 뿌리치고 옛 애인을 향해 마구 달려간다. 레닌 언덕 위에서 나는 왜 나타샤와 송혜련을 비교하면서 영화 백야를 결부시켰을까. 앞으로 닥칠 어떤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나의 감정을 합리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랬는지 모른다. 처음 겪는 그 백야 속에서 감정이 충만하여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나타샤가 파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조각으로 빚어놓은 것같이 정교한 그녀의 눈과 코 그리고 입술이 나의 시야 가득히 느껴졌다. 여자는 무엇인가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다가 망설인 듯하군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좋은 느낌이 드는 사람한테는 느낌도 빨리 온다고 합니다. 표정만 보아도, 숨소리만 들어도,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합니다.』 여자가 웃었다. 그녀의 하얀 치아가 백야 속에 빛났다. 『버드블루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어요.』 『묻고 싶으면 묻지, 왜 망설입니까?』 『있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없습니다.』 『그래요? 있든없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존심을 세우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거짓말을 한 데 있었다. 나는 왜 애인이 없다고 뻔뻔스런 말을 하였을까. 그 말을 해놓고 나는 송혜련에게 죄를 지은 느낌이 들어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시 말을 고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어색할 듯해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그녀와 데이트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간 나는 마치 반성문을 쓰듯이 서울의 송혜련에게 편지를 썼다. 나타샤를 만났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편지는 그렇게 썼지만 나는 그것을 다 쓰고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