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와 나는 그후로 얼마간 서먹한 기분이 계속되다가 그것도 소멸되고 우리는 좋은 친구로 남았다. 지금도 그녀와 함께 레닌그라드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아내가 물었을 때 여행사 가이드라고 거짓말을 했던 생각이 난다. 실제 나의 여행 가이드이기도 했던 그녀는 훗날 라스토푸친이라는 과학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과학 아카데미 대학교 교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의 과학자문기관의 연구위원이었다. 내가 사업차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우연하게 라스토푸친 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나타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찬 석상에 그녀가 나온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타샤는 아름다웠고, 그녀의 목에는 내가 레닌그라드 고스티니드브르 백화점에서 미화 100달러를 주고 사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와 다시 상봉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내가 연구한 통신 감청 시스템의 개발과 그것으로 인한 모종의 사건이었다. 그해 겨울에 나는 연구의 성과를 올렸고, 그것을 즉시 실용화시켰다. 그 시범으로 나는 소련 KGB의 내부 전산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세계 최초로 국제 해커가 되었는지 모른다.
KGB에서 사용하는 전산망은 내부 감시체제가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전산망에 다른 정보가 들어오거나 도청을 하면 그것을 가려내어 중지하는 장치였다. 당연히 들어온 경로를 추적하게도 되어 있었다. KGB의 전화망은 아주 잘 되어 있었는데, 특히 모든 기관에 도청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어, KGB 통신본부는 전화국을 방불케 하는 복잡하고 방대한 시설이 되어 있었다. 중앙당은 물론이고, 지방 당 기관, 간부의 집, 각 사회단체, 기업체, 개인 등의 전화는 모두 KGB의 감청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천명이 그것을 녹음하고 들으면서 중요도에 따라 분류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외국 대사관이나 상사 주재원 등 외국 기관의 도청도 당연했다. 모든 국제 전화 역시 도청이 되었다. 무선과 유선을 가리지 않은 이와 같은 감청은 하늘에 띄운 인공위성과도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미줄을 연상시켰다.
감청방지 역류 시스템으로 KGB의 전산망 내부로 들어가서 밝혀낸 것은 그들의 감청 범위가 방대하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KGB에서는 미국 대사관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화를 감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