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벤처기업 (338)

 당시 미소간의 관계는 상당히 온화했다. 냉전이 사라질 조짐이 보일 만큼 양국의 정상들은 화해 무드를 고조시켰다. 그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무렵은 고르바초프가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중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하자는 서명을 마쳤을 때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고르바초프가 KGB 책임자에게 나의 석방을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 외교관 해커 한 사람 잡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해 보게. 모스크바 대학생 가운데 해커가 많다면서? CIA 인터넷이나 NSA 통신망에는 왜 못 들어가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고르바초프의 이 전화 대화는 내가 개발한 감청 방어시스템을 이용해서 도청한 내용이었다.

 나를 스파이로 몰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고르바초프는 미국과의 좋은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서로 탐색하고 정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피차 알고 있는 일이다. 나는 다섯시간 만에 풀려 나왔는데, 외교관을 연행했던 문제는 그 후에도 논쟁의 소지가 되었지만, 이쪽에서도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래 끌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나는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은 기간 동안 근무하다가 일년을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당시 KGB에 끌려갔을 때를 연상하면 눈앞이 아찔하다. 물론, 외교관을 끝까지 감금해서 분쟁의 불씨를 키우면 더 큰 불이익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나의 신분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즈이코프 국장과 알렉세이비치 담당관에게 네시간 정도 취조를 받았는데,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매우 정중하게 대했지만, 공포 분위기를 주기도 하였다. 아무도 모르게 증발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즈이코프 국장이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에 나에게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고, 다른 방으로 안내하고 소파에 앉게 하고는 커피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미국 대사관쪽에서 일단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즈이코프 국장이 나에게 사과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사과할 마음이 없는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연행해 올 때 요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통신 담당관 알렉세이비치가 차로 나를 대사관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자정이 넘어 대사관에 들어가니 비상이 걸려서 대사를 비롯한 간부들이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