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파트너십과 파이의 크기

윤원창 생활전자부장 wcyoon@etnews.co.kr

21세기 전자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핵심 경영요소로 「디지털(Digital)화」를 꼽는 사람이 많다. 디지털화란 단순히 기술영역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화가 이제는 한 시대의 획을 긋은 사회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거대한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대형 전자업체들이 하나같이 「디지털 경영」을 외치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의 디지털 경영 요체는 혁신(Innovation), 개방성(Openness), 파트너십(Partnership) 등 세가지로 집약된다. 최근 고객의 욕구가 다양화되고 변화가 빠르기 때문에 기업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고객과의 열린 사고와 태도가 필요하고 또 생산성이 낮은 제도나 시스템, 구태의연한 관습·관행 등을 혁신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두 요소보다 중요한 것은 파트너십이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요즘에는 아주 새로운 개념의 상품과 서비스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고객 욕구 변화와 함께 시장도 변화무쌍하다. 그만큼 이제 어느 한 기업이 한정된 자원을 갖고 상품기획이나 연구개발·디자인·생산·마케팅 등 모든 경영활동의 프로세스를 독자적으로 운용하기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시장변화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역량 있는 기업과의 파트너십 형성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IT산업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산업간에, 업종간에 경계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생활전자산업만도 고유의 생활전자에다 PC·정보통신·인터넷 등 최소한 네가지 산업이 서로 맞물려 있는 거대한 비즈니스 생태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파트너십은 기업들이 제품개발 경쟁 못지 않게 사활을 걸고 경쟁하는 제품규격 및 기술방식의 「표준화」 경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방식이라도 파트너십이 부족하면 표준으로 정착되지 못한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 70년대 VCR 표준경쟁에서 VHS방식을 개발했던 마쓰시타가 미국의 영화사 등 주요 소프트웨어 업체들과 규합, 기술적으로 우수한 측면이 많았던 소니의 베타방식을 밀어내고 지금껏 VHS방식을 세계표준으로 유지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또 한때 큰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를 모아왔던 차세대 영상매체인 DVD가 아직까지 예상만큼 빠르게 보급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소프트웨어 공급업체와 파트너십 부재에서 빚어진 결과다.

최근 휴대형 멀티미디어 기기의 소형·경량화에 필수적인 차세대 저장매체인 플래시메모리 카드 규격표준화를 둘러싸고 삼성전자를 비롯, 소니·샌디스크가 한창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몇몇 선진업체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져온 표준화 경쟁에 분야는 차치하고라도 국내 업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관심을 끈다. VCR 표준경쟁 등을 감안하면 이 경쟁도 어떤 기업이 얼마나 많은 관련기업과 파트너십을 형성해 참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독창적 기술은 어떤 기업이든 혼자 개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제품화하고 그 산업의 새로운 표준으로 인정받아 계속 시장을 창출해 나가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의 상품이나 서비스 개발은 어차피 모험사업이다. 혼자서 모든 위험을 감내하고 성공하면 그 열매를 혼자서 차지한다. 하지만 그 열매를 독점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새 기술의 제품화에 주변·파생산업의 여러 업체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해 그 기술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생태체계를 일궈 나가야 장래를 보장받는다. 여러 분야가 협동해서 파이의 크기를 계속 키워 나눠먹는 격이다.

이런 점에서 플래시메모리 카드규격 표준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독자 행보보다 파트너십을 통한 세력확장뿐이다. 세력확장은 가까운 곳, 다시말해 국내 관련업체들을 우선적으로 포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 경쟁기업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게 되는 만큼 문을 꼭 닫고 독자적으로 응용제품 개발까지 모두 총괄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디지털 시대 표준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경쟁업체인 샌디스크의 세력확장 전략을 보더라도 그렇다.

현재 사업을 일군다는 「기업가정신」 대신 파트너십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체계를 일군다는 뜻의 산업간·기업간 「협업가정신(Intrapreneurship)」이란 말이 왜 유행하는지 곰곰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