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만해도 마이크로소프트(MS)는 IBM의 하청업체라는 굴레를 크게 벗어날 것같지 않았던 회사였다. IBM은 대형컴퓨터 시장의 80%, 전체 시장의 50%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IBM과 어떻게 해서든 거래 관계를 맺고자 한 것은 물론 MS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80년 여름 마침내 MS에도 기회가 왔다. IBM이 소형컴퓨터 시장 참여를 결정하면서 MS는 그 운용체계 개발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일개 중소기업 MS가 직원 34만명의 거대기업 IBM을 잡으리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회를 포착하는데 집요하고 영특했던 MS는 이때 벌써 IBM 의도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IBM은 중대형 시장을 확실하게 제패하고 있었지만 소형 시장에서는 신생기업 애플에 맥을 못추었다. 그러니까 소형 시장에서 당장 수익을 내겠다기보다는 애플의 급성장에 제동을 걸 일종의 대항마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IBM의 이런 의도는 이 계획을 「도토리(acorn)프로젝트」로 명명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1년안에 「도토리」를 개발해서 출시한다는 이 프로젝트는 당연히 급조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자체 개발하던 기존 정책을 포기하고 시중 부품을 이용해서 제품을 설계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MS는 비슷한 처지의 인텔과 함께 IBM의 부름을 받았다. 인텔은 8088마이크로프로세서를, MS는 MS DOS운용체계를 각각 공급했다. 어찌됐건 IBM은 「도토리」 아키텍처를 처음부터 개방해버린 셈이었다.
MS가 IBM의 허점을 발견한 것은 이 대목에서다. 아키텍처의 공개는 이를 본뜬 호환 제품의 등장이 그만큼 쉬워진다는 뜻이다. 이는 MS에 절호의 기회였다. MS는 애당초 IBM으로부터 직접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IBM에는 파격적 가격에 DOS 사용권을 제공하되 호환기 회사들로부터 정당한 사용료를 받아낸다는 복안이었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도토리」는 「IBM PC5150」(PC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다)이라는 정식 상표로 엄청나게 팔렸고 호환기 업체들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MS가 IBM과의 결별 시점을 포착해내는 민첩성은 더욱 놀랍다. IBM은 86년까지 PC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장점유율은 호환기 업체들에 점점 밀려 20%대로 떨어졌다. 게다가 호환기 업체들이 텃밭인 중대형 시장을 침투해 오는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IBM이 자사의 중대형컴퓨터와의 연계성에 중점을 두고 개발한 소형컴퓨터와 그 운용체계가 PS/2 및 OS/2다. PC와 호환이 불가능하도록 새로 설계된 폐쇄형 아키텍처가 채택됐다. 그러나 IBM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MS DOS기반의 호환PC 점유율은 오히려 높아졌고 PS/2와 OS/2는 실패로 끝났다.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OS/2개발에 함께 참여했던 MS가 IBM과 결별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두 가지 배경에서라고 보면 된다. IBM보다는 호환PC의 발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 그리고 OS/2와 별도로 독자개발해 놓았던 비밀병기 「윈도」가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92년 MS는 IBM과의 12년 관계를 과감하게 청산했다. 오비이락일까. 결별직후 윈도는 중대형컴퓨터에 미련을 가졌던 IBM을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몰아넣고 만다.
올해로 창사 27주년을 맞는 MS에는 모두 세번의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던 IBM과의 결별과정이 그 첫번째이고, 95년 12월 네트워크전략을 놓고 독자 방식인 MSN(현재의 MSN과는 다르다)과 인터넷 사이에서 갈등했던 과정이 그 두번째다. 잘 알려진 대로 두번째 위기 역시 속전속결로 인터넷을 선택함으로써 위기를 대약진의 발판으로 삼았다.
세번째 위기가 바로 토머스 잭슨 판사로 상징되는 미국 법무당국과의 4년째 이어지는 독점공방이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포착하는데 능수능란했던 MS로서도 이번만은 사정이 다른 것같다. 회사를 3개로 분할하는 법무부 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판단이 잘 안서는 모양이다. 더욱이 잭슨은 이르면 이달 중에 최종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간의 관심은 법원 판결보다는 MS의 위기탈출여부에 더 쏠리고 있는 것같다. MS의 선택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