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논리

지난 95년 D램업체들은 극과 극을 동시에 경험했다. 호황기였던 당시 D램업체들은 배짱을 튕기며 영업했으나 그해 말 대형 PC업체들이 값싼 현물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공급선이 끊겨 순식간에 판로를 잃기 시작했다. 불황은 이때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이어졌다.

PC업체와 D램업체간 장기공급계약도 96년 이후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얼마든지 제품이 넘쳐나기 때문에 굳이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은 역전되어 장기공급계약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호황으로 D램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IBM·컴팩·HP·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주요 PC업체들은 잔뜩 몸이 달아 있다. 이들 PC업체는 삼성전자·현대전자·마이크론·인피니온 등 D램업체들과 3∼5년 이상의 장기공급계약을 맺는 방안을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들 회사의 경영진들이 나서 삼성과 현대에 D램 공급을 요청하고 있다. IBM의 구매담당 부사장은 직접 방한할 뜻을 비쳐왔으며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구매담당자는 아예 서울의 한 호텔에 장기 투숙해 매일같이 삼성과 현대의 생산 스케줄을 점검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삼성과 현대는 마냥 즐거운 입장만은 아니다. 삼성과 현대는 PC업체들의 요구에 쉽게 응해줄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생산능력으로 장기공급계약은 물론 물량 확대가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을 피하고 있다.

모 국내 D램업체의 경우 올해 생산할 물량에 대한 주문이 끝난 상태여서 장기계약을 하자는 제의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D램 관계자는 『당장 계약하자니 오를 게 뻔한 가격이 눈에 선하며 그렇다고 전략적인 고객의 제의를 마냥 거절하기도 힘들다』면서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아직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국내 D램업체들은 앞으로 한두달 정도 시장 상황을 더 지켜본 후에나 PC업체들과 본격적으로 장기공급 협상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럴 때 전략적인 사고가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는 격언처럼 당장 호황기라고 PC업체들과의 관계를 잘 못했다가는 예전과 같이 「큰 코 다칠」 일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대만업체들의 등장으로 우리의 입장이 예전과 같지 않는 상황에서 PC업체들의 어려움을 살펴주면서 공존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야 할 때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