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선언과 어떤 기억-서현진-

95년 9월 15일 저녁, 중국 옌지(延吉)의 한 호텔. 「코리안컴퓨터처리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남북대표들은 사흘간의 대회를 합의문 발표라는 대미로 장식하고 만찬장에서 다시 만났다. 합의문 서명식이 끝나고 40도가 넘는 중국술이 여러 순배 돌자, 만찬장은 행사기간 내내 감돌던 긴장감은 간데없고 예상외의 파격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남쪽대표가 북쪽대표의 청을 받아들여 「사랑의 미로」를 부르자, 북측대표가 『백두산에…』로 시작되는 행진곡풍 가요로 화답했다. 남북대표들이 함께 어우러져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도 목청껏 불렀다. 테이블 곳곳에서 어깨를 껴안으며 사진을 찍고 그새 낯을 익힌 이들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술잔을 나눴다. 남측대표단 일원이었던 필자도 그틈을 비집고 테이블 옆자리의 북측 대표에게 말을 건넸다.

『신의주에 큰 홍수가 났다는데 댁네는 두루 평안하십니까?』

내 딴에는 무얼 알아보자는 것보다는 약간의 취기를 빌려 친근감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신분을 사회과학원 연구사(책임연구원급)라고 밝힌 40대 초반의 그는 그러나 필자의 질문에 금세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홍수라뇨? 나는 모릅네다. 그런 일이 있었습네까?』

서울을 출발할 즈음 그러니까 95년 9월초 압록강 하류에 큰물이 나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남쪽에서는 구호품을 보내느니 마느니 했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상대방이 정색하고 나오자, 오히려 물은 쪽에서 무안해지고 말았다. 그 간극을 메워 보고자 다시 88담배를 권했다. 그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남조선 담배 너무 심심해서(순해서) 못 피우갔어요. 나는 우리 담배가 좋습네다.』

그러면서 그는 필자가 권한 88담배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신의 담배를 찾았다. 70년대 풍의 잘록한 크기의 담배 한 개비를 안주머니에서 달랑 꺼내 무는 그의 표정은 매우 독특했다. 필자는 그제서야 대회 직전 남측대표단장의 「당부의 말」이 생각이 났다.

『저쪽 사람들을 대할 때 절대 자본주의 우월성을 암시하는 말이나 북측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대화하지 마세요. 그들은 자존심이 아주 강합니다. 재삼 당부드립니다.』

귀국 후에 안 일이지만 「당부의 말」에는 여러 뜻이 담겨져 있었다. 학술대회는 중국 조선족 인사들을 매개로 어렵게 성사된 것이었다. 남북의 서로 다른 한글(조선글)자모순 배열, 자판배열, 부호계(코드시스템), 그리고 컴퓨터용어 등 네 가지에 대한 공동안을 도출하자는 것이 공식 의제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가한 북측대표단 20명의 경비는 모두 남측에서 지원한 것이었다. 경제사정으로 참가가 어렵다는 것을 남측에서 설득하여 불러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표단장의 당부의 말은 그런 배경으로 참가한 북측 사람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져 있었던 셈이다. 북측대표로부터 겪은 무안감에서 해방된 것은 곧이어 시작된 북측 단장의 웅변조 폐막사에서였다.

『북남의 과학자들이 조선문자 콤퓨터 처리에서 아직 합의 보지 못한 문제들은 김일성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애와 만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철저히 주체적 입장에서 풀어나간다면….』

학술대회는 그렇게 끝났다. 용어표준안을 마련하는 등 가시적 성과가 없진 않았지만 정작 중요한 나머지 세 분야에 대해서는 얼굴을 맞대고 함께 토론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행사는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한번 더 열렸다. 성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방식의 행사를 통해 어떤 가시적 성과가 나오리라고 본 남측 사람들은 애당초 없었다. 만남 자체가 성과였으며 큰 뉴스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주체의식이 강했지만 결국 남측의 지원으로 대회에 참석했던 북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IT교류를 위해 남측이 북측 사람들을 불러내 벌이는 잔치는 이후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냉철한 논리와 엄격한 과학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 IT교류에는 그런 식의 잔치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두 정상이 6·15선언을 일궈내는 과정을 TV로 지켜보면서 필자는 마음이 찹찹했다. 평양의 일정들이 생중계돼 남쪽 사람들을 들뜨게 했지만 북쪽 사람들에게는 방북한 남쪽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방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서로를 너무도 몰랐던 5년 전 「코리안컴퓨터처리학술대회」의 씁쓸한 기억들을 되살려 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