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445) 벤처기업

해외 진출<35>

『그건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 그 동안 얼마나 불편하게 해드렸으면 모신다고 해도 들어오시지 못할까?』

『직접 한 지붕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이웃에 아파트를 얻어 드리고 조석간에 출입을 했으면 같이 산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예요?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게 해드린 것인가예?』

『아무리 이웃이라고 하지만 다른 곳에 사는 것은 달라.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어. 내가 성장할 때와는 달리 장가를 보내고 며느리와 같이 살고 싶어하신 것이 본 마음이야. 싫다고 하시지만 그건 본 마음이 아니야. 같이 사시기를 원해.』

『그럼 왜 장가를 보냈나요. 평생 데리고 사시지.』

『닥쳐, 무슨 그따위 말이야?』

내가 다시 화를 내서 아내를 또 울렸다. 고부간에 분쟁이 나면 나는 대체로 어머니 편에서 말했다. 어머니에게서 며느리 험담을 들을 때는 아내 편에서 말하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었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것은 아내에게 어머니 편을 들면 아내는 매우 싫어했지만, 어머니는 아내 편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였다. 어머니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인지, 며느리에 대한 불평이 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원수간에 만난 그같은 고부갈등 때문에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아내에 대한 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골이 깊어가는 것이 나 자신도 불안했으나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부갈등은 그 정점을 달해가고 있었다.

실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하면서 왜 그럴까. 그것은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에 대한 보복일까. 고부갈등이 심해서 한번은 정신과의사에게 자문을 구한 일이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이 장가를 가면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어느 정도는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실감을 이성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딸을 얻었다는 감정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대부분의 어머니들이지만 그러한 정서 순화가 되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항상 며느리와 적대 관계에 놓인다고 한다. 옛날에는 그 보복으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거나 며느리를 학대했지만, 오늘날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오히려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학대를 당하거나, 아예 한 집안에서 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