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몰락한 대기업 따라하기

「운영자금과 시설투자에 쓰겠습니다.」

최근 코스닥시장에 등록한 A업체의 유가증권발행 신고서의 자금사용 계획안에 적혀 있는 공모자금 사용 용도다. 하지만 이 업체는 등록 2달여만에 B업체에 7억5000만원을 출자했다. 최근 등록한 C·D·E 업체도 타법인 출자 공시가 경쟁적으로 올라왔다. 유가증권발행 신고서의 자금사용 계획을 무시하고 특정 업체의 지분 확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코스닥등록을 앞두고 공모를 실시하는 벤처기업들 거의 모두가 유가증권발행 신고서의 자금사용 계획안에 하나같이 운영자금과 시설투자에 공모자금을 사용하겠다고 신고한다. 증자의 목적도 대동소이하다.

유가증권발행 신고서의 기재사항을 허위로 작성하는 것이 엄연한 불법인데도 공개적으로 모금한 자금을 오용하는 경우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지금까지 공모자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도 제재조치를 받은 벤처기업이 한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은 인력난 운운하며 자금 사용처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결국 마음만 먹으면 공모자금은 사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녀와 아내에게 보유지분의 일부(20억원)를 떼어 주었습니다.』 최근 기자가 만난 모업체 사장의 말이다.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회사 지분 일부를 현금으로 바꿔 집안 식구에게 양도한 것이다. 보호예수기간이 끝나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지난해 골드뱅크가 펀딩으로 코스닥 신화를 창조하며 황제주로 군림하기도 했지만 결국 잘못된 투자로 주주들과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경영자가 바뀌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골드뱅크도 유가증권발행 신고서에 신규자금 사용 용도를 신규투자와 운영자금으로 기재했다. 결국 주주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문어발식 경영에만 골몰했다는 비난을 한몸에 받은 채 지금은 소외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벤처기업의 출자열풍으로 지주벤처기업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냈지만 선단식경영의 또 하나의 단초를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최근 메디슨 등 지주벤처기업들이 유동성자금 부족으로 M&A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한국의 벤처기업이 몰락한 대기업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디지털경제부=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