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진출<38>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천륜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겪게 되는 슬픔이라든지, 상실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자리로 사색하게 했다. 나는 아버지의 무지와 폭력을 용서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이 부모의 허물을 어떻게 심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한 일은 단 한번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슬픔보다 지나온 세월의 애환을 상기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아내 역시 울었다. 아내의 곡에 대해서 그 성격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시아버지와의 이별 때문에 운 것이라기보다 분위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경기도 일원에 있는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있을 때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러시아 정부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은 대통령 과학자문 연구위원 라스토푸친이었다. 간략하게 정리된 초청 내용은 자동화시스템에 대한 자문이었다. 단순히 자문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러시아에서는 지금 생필품의 생산성 증폭을 위해 공장 자동화를 위한 설비투자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해외 진출을 위해 만들어 배포한 카탈로그 영향으로 추측되었다. 아니면, 다른 루트로 정보를 입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러시아는 투자 대상국으로는 내키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기술제휴라든지, 기술용역 분야라면 밑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대방이 찾는 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음날 즉시 연구실장 윤대섭과 함께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떠나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모스크바에 다녀올 동안 어머니 문제는 당신에게 맡기겠소.』
『무슨 말을 그렇게 애매하게 하지에?』
아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뭘 애매하게 한다는 거요.』
『그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 분명히 말하이소.』
『뭐가 돌려 말한 거야. 같은 말이지. 어머니 혼자 되셨으니 이제는 함께 사시는 것이 정상이잖아?』
『따로따로 살면 비정상인가에? 그건 어머니 마음에 달렸지, 와 나의 뜻에 달렸지에?』
『그것도 같은 말이잖아? 당신이야말로 돌려 말하지 말았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