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예산은 단 한푼이라도 헛되게 쓰여서는 안된다. 때문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사업의 경우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하고 몇번이고 타당성을 검토해 투자우선순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행정부가 짜놓은 예산안을 국민의 대표가 심의하고 불필요한 예산낭비 견제에 나선다.
그런데 최근 국가예산을 다루는 기획예산처의 행동을 보면 마치 정부위에 군림하는 듯한 인상이다. 예산안 편성에 단 한푼이라도 반영하려는 각 부처 관계자들의 행동을 보면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하다. 명색이 중앙부처의 국실장들이 직급상 한참 아래인 과장이나 고참 사무관들에게 쩔쩔매야 하고 각 부처 실무과장들은 기획예산처 실무자인 사무관들에게 밉보여 예산이 깎일라 조마조마하고 있는 게 우리 정부의 현실이다. 사업의 타당성보다는 소속이 우선시되고 있는 우리 행정부처의 단면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우주개발중장기계획의 하나로 올해부터 착수키로 한 우주센터건설사업이 기획예산처의 이같은 행태로 착수조차 못하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주재로 15개 부처 장관과 민간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국과위에서 사업추진을 결정, 예산에 반영된 우주센터건설사업 예산 10억원이 반년이 넘도록 해당부처에 배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 자리에는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석해 의결했다.
그러나 기획예산처는 어쩐 일인지 올해 초 「우주센터건설사업이 타당성이 있는지를 알아본다」며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연구용역을 줬고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정된 예산조차 배정을 미루고 있다. 대통령이 주재하고 관계장관들이 위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결정하고 지시한 사항을 기획예산처가 정면으로 뒤집은 셈이다.
더구나 내년도 우주센터설립 예산이 대폭 삭감된 상태에서 기획예산처가 KDI의 연구용역 결과를 이유로 예산편성을 주저한다면 그야말로 초법적인 행태까지 보여주는 셈이다. 「과학기술혁신을 위한 특별법」에는 국과위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사전조정결과에 따라 기획예산처 장관은 예산을 우선적으로 반영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의 이같은 행태가 계속될수록 국가백년대계를 책임질 과학기술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해 설치된 국과위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우선 「령(令)」이 서야 한다.
<경제과학부·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