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북한이 현대그룹에 개성공단 개발권을 준 것은 일단은 놀라운 일이다. 이번 일은 적어도 북한이 그동안 적용해온 개방원칙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파격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북한의 개방정책은 지금까지 80년대 중국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제한된 지역이나 분야를 선택적으로 고립시켜 개방함으로써 체제 내부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는 양상으로 진행돼 왔다. 이를테면 개방의 필요성과 함께 자본주의 황색바람은 철처히 차단한다는, 실제로는 양립 불가한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목표 아래 북한이 지향해온 실천방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점분산형(點分散型)」개방정책이다. 개방지역을 하나의 점 형태로 고립시켜 놓고 개방효과에 따른 알곡만을 건져올린다는 전략이다. 나진·선봉경제특구나 금강산관광특구는 그 실천사례가 된다. 두 지역 모두 수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군사지역이 아니며, 게다가 상호 고립적인 지역이라는 공통점까지 갖고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북한측을 향해 부단하게 두드려댔던 서해공단의 부지 선정작업도 이러한 원칙에 의해 추진돼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서해공단의 부지가 북한 최대 군사시설 밀집지역 가운데 하나인, 그러니까 북한이 이제까지 수용 불가를 외쳐온 개성으로 낙착을 본 것이다.
북한이 개성을 개방한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현대그룹을 포함한 남한기업들은 그동안 북한측에 경제논리에 우선한 지역의 개방을 줄곧 요청해 왔다. 예컨대 항구를 끼고 있는 서해안 도시이거나 산업기반이 갖춰져 있고 인력조달이 용이한 인구밀집 대도시 등의 조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서해안 도시의 경우는 물류·인력조달, 산업기반시설 활용 등 경제성을 고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해안은 항구조건 등 지역적 특성에서 서해안에 비해 절대 불리하다. 산업기반시설이 있는 대도시가 선호되는 것은 공단이 들어설 경우 시설 재활용이 가능하고 관련업종에 대한 산업 마인드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구 밀집 대도시는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따라서는 자본주의형 내부시장 형성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에 따르면 남한기업들의 선호도는 평양·남포권을 필두로 해서 해주·개성권, 신의주권, 원산·함흥권, 나진·선봉권 순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앞서 언급한 점분산형 개방정책의 원칙에 따라 도출된 개방조건들을 제시해 왔다. 가령 체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내륙보다는 해안지역을 개방하되 군사기지가 밀집된 지역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전체 교역량의 70% 이상을 수용하고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 접경지역을 활용하는 것도 북한측이 선호하는 조건중의 하나다. 접경지역은 공단이나 특구에 대한 지원역할과 출구역할 등 경제적 호환 효과가 그 어느 도시보다 크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개방지역 선호도는 나진·선봉권을 필두로 신의주권, 원산·함흥권, 해주·개성권, 평양·남포권 등의 순으로 나타나 남한기업들의 선호도와 크게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상대로 북한은 91년 12월 나진·선봉을 북한 최초의 자유무역지대(경제특구)로 지정하면서 남한기업을 비롯한 외국기업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개방에 따른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체제수호 쪽에 더 많은 무게를 둔 것이다. 그러나 나진·선봉지역은 개방 10년이 가까워지는 현재까지도 열악한 사회기반시설(SOC)과 관련산업 기반시설의 부재로 국제사회로부터 실패한 경제특구로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북한이 이번에 보수극좌 경향의 군부 반대를 무릅쓰고 개성을 남한기업에 내주기로 한 것은 우선 나진·선봉경제특구의 실패가 큰 교훈이 됐을 것이란 분석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 과정에는 공단의 완성시기가 2008년이어서 당장 문제가 없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남한의 전력이나 통신시설들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북한의 이번 결정은 결과적으로 90년대 이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체제수호보다 경제적 효율성에 더 무게가 실린 개방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